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3)
성소는 거룩한 곳, 거룩해야 할 곳, 이 거룩함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근원이다. 이 거룩함은 세상이 잃어버린 것을 회복해야 할 표준이다. 더럽혀진 세상은 성소에 나아와 거룩하신 분을 만나고 죄 씻음을 받아야 한다. 더럽혀진 세상은 여기서 새 세상의 비전을 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성소는 세상과 차별화하는 구별된 개성을 간직해야 한다.
옛날처럼 오늘도 ‘맛을 잃은 소금’, ‘광채를 잃은 빛’으로 인하여 성소는 원수들에게 짓밟히고 성소의 주인의 이름은 모독되고 있다. 성소의 영광의 상징물들은 심히 훼손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성소회복을 성도의 기도의 우선순위로 놓아야 한다. 그리고 기도는 책임을 수반한다. 이 시대 성소의 청지기들의 삶이 성화될 때 우리는 성소재건의 부흥을 보게 될 것이다.
시편 74 편 성소의 회복을 위한 기도
Ⅰ. 주의 대적이 떠들며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8]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10]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11]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주의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손을 빼내시어 그들을 멸하소서
Ⅱ. 주께서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4] 리워야단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것을 사막에 사는 자에게 음식물로 주셨으며
[15]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 주께서 늘 흐르는 강들을 마르게 하셨나이다
[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8]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원히 잊지 마소서
[20] 그 언약을 눈여겨 보소서 무릇 땅의 어두운 곳에 포악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나이다
[21] 학대 받은 자가 부끄러이 돌아가게 하지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23] 주의 대적들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께 항거하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항상 주께 상달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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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위 종교, 기독교 : 통계청은 5년에 한 번씩 인구 센서스(census of population, 인구주택총조사)를 하는데 종교인구는 10년마다 곁들여 조사하고 이듬해에 발표한다. 2015년에 시행된 조사에서,종교별 신자수는 개신교인 967만명 (19.7%), 불교인 761만 명 (15.5%), 가톨릭교인은 389만 명(7.9%)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개신교인인 셈이다. 이는 개신교가 130년이라는 짧은 선교 역사를 통해 대한민국 1위의 종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상 밖의 결과로 한국 교회는 웃었을까?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1200만에서 1400만명으로 어림잡던 개신교인이 1000만명 이하로 떨어졌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단 신자들과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소위 ‘가나안’ 신자들도 포함된 수치이기에 그들을 대략 150만 명 정도로 잡는다면 실제 개신교인의 수는 720만 명 남짓이 된다. 그런 까닭에 한국교회도 700만 명대로 떨어진 통계표를 받아 들고 1위 종교라는 등수에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한국교회가 박수 칠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교인 숫자만 많으면 뭐 하나’ 하는 자조가 우리 내면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1위 자리가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거룩성을 세속과 맞바꾼 변질의 결과라는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그가 전원생활을 하던 월든 호수를 이렇게 평가했다. “작지만 이 얼마나 강한 호수인가?”
그 표현이 참 좋다. 강이나 댐은 사이즈가 크거나 물을 많이 담아 두었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수질이 좋아야 좋은 강이요 댐이다. 강한 호수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호수를 말한다. 물이 깨끗한 1급수 호수가 크기는 작더라도 강한 호수다.
한국 교회 초기 기독교인들은 진실했고 정직했으며 성경의 정신올 따라 살고자 하는 각오가 있었다. 예배당이 있는 마을에는 탐관오리들이 부임을 꺼렸다. 뇌물도 받을 수 없고 못된 짓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교인들이 불의에 대한 감사자 역할을 했다. 자기희생이 없
이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세상은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성결된 생활을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로 들어왔다. 그렇게 진실했던 한국 교회가 이제는 변질까지는 아니라 해도 머리카락이 밀리고 연자맷돌을 돌리는 어릿광대 삼손처럼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성공한 구원, 실패한 거룩 : 박영선 목사가 시무하던 시절,남포교회는 '구원 이후’라는 주제로 학술제를 열었다. 학술제에서 고신대학교의 박영돈 교수는 “한국 교회는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데 는 실패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한국 교회는 구원받고 축복을 누리는 데만 열심이었지 거룩하게 살아가는 데에는 열심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힘이 달려 오히려 교회가 세상에 의해 변질되었다는 뼈아픈 지적이다.
박영선 목사는,이에 대해 “성화하지 않는다고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다만 세상 사람들에게 쪽팔린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한국교회가 세상에 낯이 깎이고 있다는 것이다. 성화 공백이 만들어 낸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주야로 기도하며 십계명을 받았다.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얼굴에 얼마나 광채가 났던지 백성들이 눈이 부셔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래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려 백성을 맞았다. 하나님만 바라보며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에게
가득 임재했기에 얼굴에서 찬란한 광채가 쏟아졌던 것이다(출 34:29-35).
우리도 얼굴을 가린다. 거룩한 광채가 없는 게 탄로 날까 봐 얼굴을 숨긴다. 성도는 장로 권사의 직분으로 얼굴을 가리고 목회자는 여러 모양의 치장으로 얼굴을 가린다.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낯가죽이 두꺼워 지고 목회를 오래할수록 광채는 나오지 않으니까 이런저런 것들로 포장하고 위장하는 것이다.
아삽의 마스길(아삽의 교훈)
이 시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은 황폐한 교회의 형편 즉 이스라엘의 이름이 거의 멸절되어가는 것을 슬퍼하고 있다. 이 재난을 자신들의 죄의 탓으로 돌리려는 겸손한 간구에서 드러난다. 동시에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택해 주신 언약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의 교회를 구원하심에 있어 지난날의 행하신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며 자비로운 가를 회상한다. 그 위로로 용기 얻어 하나님께서 마침내 비참한 처지에서 구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이 패망하고 백성들은 느브갓네살 왕에게 바벨론 포로로 붙들려 갔었던 유대 역사의 기간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통치기간으로 본다. 두 번째 견해를 더 타당하게 보는데, 백성이 포로로 붙잡혀 갔을 때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소가 불타 잿더미가 되고 조각품이 부서져 전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안티오쿠스의 잔인하고 포악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성전을 수치스럽게 더렵혔고, 그 안에 이방 우상들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건물은 상처를 입지 않고 남았고, 나무나 돌들은 불에 소멸되지 않았다.
안티오쿠스에 의해 성전이 무참히 모독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신실한 자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바라볼 때 성전이 갈대아 사람들에 의해 타버렸을 당시를 돌이켜 보고 이 두 재난을 한 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안티오쿠스의 악행은 마케베우스서에 잘 기록되었다. “안티오쿠스는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무엄하게도 성전 깊숙이 들어가서 금, 은은 물론이고 값비싼 기물들을 빼앗고 찾아내는 대로 모두 약탈하였다. 많은 사람을 죽인 다음, 오만 불손한 욕설 남기고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진리는 땅에 떨어졌다. 율법서는 발견되는대로 찢어 불살라버렸다.”
안티오쿠스는 단 사흘 만에 8만명을 죽였는데, 보이는 대로 어른, 아이 여자를 모조리 죽였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경, 유대인들은 헬라제국의 통치아래 있었다. 헬라의 왕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을 향하여 극악한 종교탄압을 했다. 이때 유다 마카베우스라는 유대인이 게릴라 전투를 벌여 헬라 세력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몰아냈다. 성전을 다시 깨끗하게 정화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리는 유대절기가 바로 ‘하누카’이다.
유진피터슨의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에서는 두 문단으로 나누고 개요를 설명한다.
1/ 주의 대적이 떠들며(원화하며) (1-11절)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큰 재앙을 겪은 후에 중보기도가 터져 나온다. 중보 기도자는 죄의 영향력과 악의 파괴력,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절박함을 느낀다. 하나님이 오시지 않는 한 회복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전능하신 하나님, 저의 모든 근심을 당신 앞에 내려놓습니다. 악의 세력이 세상을 압도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신의 능력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승리를 이루실 당신께 저의 의심과 걱정, 두려움, 절망을 올려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2/ 주께서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12-23절)
[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하나님은 잘못된 것과 악한 것을 멸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멸하시는 것은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불도저가 빛으로 가득찬 생기있는 거리를 만들기 위해 빈민굴의 집들을 무너뜨리듯이,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혼돈과 어둠을 공략하신다.
만군의 주 하나님, 지금 제가 겪는 고통이 당신의 구원 역사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지금 이 세상은 혼란스럽지만, 당신의 뜻이 여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믿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언제까지입니까? 고난의 시간이 힘겹고 두려운 것은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난 중에 있는 시인은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하나님께 여쭙게 되니 이어지는 기도들이 터져 나온다. 이렇게 고난을 겪도록 주님이 내버려두신 우리가 바로 당신의 양인데.... 그렇게 폭력을 휘두르는 저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모욕하는지..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그 하나님은 이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자리매김 하신 분이심을...그러니 청할 수 잇다. 하나님은 당신은 이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분이십니다. 기도가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선명해진다. 그러니 기도는 중언부언이 될 수 없다.
[16]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17]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16-17절
한낮도 어둔 밤도 주의 종복이요 해와 달, 뭇별조차 주님 뜻에 따랐지요.
대지를 바르게 잡리잡게 하시고 한 해를 나누어 계절을 정하시고 아득하고 거친 것들 다듬으셔서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으니 주님이 아니라면 뉘 할 수 있으리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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