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 자손의 시, 인도자를 따라 깃딧에 맞춘 노래]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의 행복
1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나의 왕,나의 하나님,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하나님께 함을 얻는 자의 행복
5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위한 간구
8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9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행복
10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아웃라인
1.도입
“가보고 싶다,살고 싶다…단 하루라도”, 이 심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닫는 이가 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도,죽기 전 가봐야 할 여행지도 아닌 주의 집이라니. 집으로 가는 길은 평범하지만,집에 있는 자만이 누릴 특권이기도 하다.
2.본문
내게 날개가 있다면-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가 있는 성전에 얼마나 가고 싶던지, 언제든 날아들어 그곳에서 수 있는 새마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물며 주님의 집에 사는 자들은 얼마나 부러웠을지 짐작만 할 뿐이다. 내게 날개가 있다면 어디로 날아들고 싶은 가. 성전 뜰안 인가,뜰 밖인가?
직접 갈수 있다면- 비록 두 발로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행렬에 동참할 순 없어도 마음은 그곳에 가닿았다. 그곳에 있는 자보다 더 그 길 위에 있는 자처럼 순례길을 꿰고 있다. 날마다,밤마다 꿈에서도 달려가던 그 길 아닌가.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되다는 말씀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하루라도 허락된다면_ 순례의 여정 끝 시인은 왕을 위해 기도한다. 왕의 평안과 이스라엘의 회복 이후 성전 사역의 복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의 천일과 비교할 수 없는 그 하루를 주님의 집에서 보낼 날을 손꼽아 기다릴 뿐이다. 시공을 초월한 영적 감수성이 듬뿍 묻어나 있다.
3.결론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주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을 이다지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빛나서 오래도록 소장하고 싶을 정도다.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마음이야말로 이미 시온의 대로요 주님의 집이다.
배경이해
시편 84편은 제3권에서 ‘아삽의 시’ 모음집(73-83편)에 이어 나오는 •고라 자손의 모음집(84-85. 87-88편)의 첫 시다. “깃딧”이란 용어는 아마도 악기나 노랫가락을 의미하여. 8판과 81편에도 등장한다. 본 시편은 하나님의 성전에 집중하는데. 성전'에 대한 명칭은 구약에서 •처소•《미쉬칸》,•성막* 또는 '장막'(오헬),‘성소’(미크도쉬). ‘회막’(오헬 모에드), ‘집’(바이트)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2절과 10절의 '궁정’(하쩨르)과 3절의 ‘제단’(미즈베아흐) 또한 성전의 일부로서 성전을 지칭한다.
이 시편은 주의 성전에 거하는 성도의 행복을 노래한다. 첫째는 주의 성전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의 행복을 노래한다. 주님을 만나 그를 예배하러 가는 시온의 대로에서 성도들은 새힘을 얻는다. 둘째는 주의 성전에 거하며 그를 예배하는 행복이다. 셋째는, 이 예배의 결과로 날마다 주를 신뢰하고 살아가는 행복이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 몇 번이라도 예배당에 갈 수 있는 이에게 이 시인의 노래는 얼마나 전달력이 있을까? 쉽지 않겠다.
이 시인에게 하나님 계신 전에 나아가는 길은 몸과 맘을 깨끗이 하고 편안함을 뿌리치고 눈물 골짜기와 유혹을 지나 이르는 순례의 목적지이다. 그 여정이 그를 거룩으로 이끈다. 현대인은 이 여정을 잃었기에 목적지에 이르고서도 도무지 이른 줄도 모른다. 그러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 그 여정 끝에 주님의 전에 이르렀으니 거기 머무는 하루고 악인의 장막에 머무는 천날 보다 나음은 그 하루가 영원으로 잇닿는 완전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1• 성전을사모하는 마음 (1-4절)
성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시안은 제단 곁에서 마음껏 집을 짓고 새끼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 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연거푸 부르고 있다. 성전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 기진맥진해졌지만, 남은 힘을 다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탄식을 쏟아냈다. 그에게는 성전보다 더 사랑스러운 곳이 없고, 거기서 자유롭게 예배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었다. 예배할 수 있는 특권, 말씀을 듣고 싶을 때 듣고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할 수 있는 자유에 감사하는가? 주님과의 교제, 주의 공동체와의 만남을 이토록 갈망하고 사모하는가? 나의 참 즐거움과 기쁨의 원천은 무엇인가?
1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악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만군의 여호와여”는 1절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마지막 12절에는 맨 앞에 나와 1절과 연결된다(수마상관법). ‘장막’은(미쉬칸)은 ‘처소’,‘거처’를 의미한다. ‘'주의 장막’은 직역하면 ‘당신의 장막들’이며, ‘장막’을 복수형으로 쓴 것이며t(강조의 복수형)은 장막의 위엄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2절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궁정'(하쩨르)은 성전의 '뜰'을 가리킨다(10절도 마찬가지)."쇠약함이여' 앞에 ’또‘,‘심지어'의 뜻인 ’감‘ 나온다. '사모하다'는 ‘간절히 고대하다’의 뜻이며,‘쇠약하다’(몸이) 쇠잔해지다'라는 뜻이다.
4절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4, 5, 12절의 "복이 있나니” 또는 “복이 있나이다”로 번역된 ‘아쉬레’는 '얼마나 행복한가!'의 뜻이다. ‘당신의 집(바이트)'은 성전을 가리킨다. 10절에서는 '성전”으로 번역되었다.
1_4절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의 행복
시편 84편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시 인의 사모함이 가득 묻어난다. “당신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라고 감탄하며,시인은 하나님 ‘처소’(장막으로 번역됨)의 사랑스러움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은 시온에 있으며,하나님이 이곳을 이스라엘과 함께 거주할 자신의 거처로 손수 택하셨다(시 24:3). 이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고(신 12:5; 렘 7:14)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 후손과 영원히 함께 거주하겠다고 약속하신 곳이다(시 78:68-69).하나님의 처소에 대한 시인의 갈망이 얼마나 컸는지, 시인은 몸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고대한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궁정”은 성전의 ‘뜰’이라는
구체적인 장소를 가리킨다. 이곳은 성전을 찾는 자들이 모이고 머물러 있는 장소로서,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시편 65:4에서 ‘성전 뜰에 머무는 사람들’을 ‘하나님 이 택하여 가까이 오게 하신 자들’로 동일시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이처럼 하나님의 처소나 그가 계신 곳의 뜰이 시인에게 사랑스럽고 소중한 이유는 그 건물이나 장소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시 인이 사랑하는 하나님 이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성전에 계신 하나님은 허상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분이며,지금도 시 인과 사랑의 교제를 지속하는 분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마음과 육체를 다 쏟아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여기서 “부르짖다”는 원래 ‘기뻐외치다’의 뜻으로 시 인이 하나님께 즐거이 사랑의 말을 외치거나 기쁨의 찬양을 부르고 있음을 보여준다(시 81:1).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에 가까이 가고픈 시인은 성전 제단에 제 집을 지은 참새나 새끼를 위해 둥지를 튼 제비를 떠올리며 부러운 마음을 표현한다. 새들처럼 자유롭게 하나님 거처로 날아가 거기서 자기와 자녀의 거처를 마련하여 하나님 가까이 살기를 소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에 사는 자들이 얼마나 행복한가!(‘복이 있나니’로 번역됨)”라고 외친다. 하나님 곁에 살며 늘 찬송하며 예배하기를 고대한다(시 27:6). 한편,시인은 1절에서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불렀고,3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으로 부른다.‘만군의 여호와’는 모든 군대의 하나님이란 뜻으로 천군천사를 거느리고 그 능력을 나타내는 군대 지휘관이자 용사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의 능력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왕’이란 표현은 시 인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셨다는 점과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을 암시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칭호에 “나의〜”를 반복하는데 시인과 하나님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시인은 주의 제단에서는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기 둘 보금자리를 얻는다고 노래한다. 참새와 제비는 성지에서 가장 흔하게 보는 조류이다. 시인은 이 참새와 제비가 성전경내를 평화롭게 드나들며 그 누구의 훼방도 없이 안식을 취하는 모습을 본 순간 우리를 애틋하게 대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 낸 것이다. 우리는 그의 참새이며 제비들이다.
참새는 성지에서도 가장 흔하고 가치 없는 새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복음에서도 주님은 참새 두 마리의 값이 겨우 한 앗사리온이 아니냐고 말씀하신다. 앗사리온은 은 동전 중 가장 낮은 화폐단위에 속한다. 그런 참새도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의 대상이라면 인생의 존재는 얼마나 소중한가를 성경은 역설적으로 평가 하고 있다.
제비는 방황하는 새의 상징이다. 제비는 한곳에 정착못해 이곳 저곳 정처없이 방황한다. 그러나 그런 제비가 꼭 정착하는 때가 있는데 짝을 찾아 사랑을 하고 새끼를 낳게 되면 비로소 안식하고자 한다. 주님은 그런 제비인생에게 기꺼이 안식처를 예비하신다. 인생은 주 안에서만 참된 안식을 발견한다.
2• 순례자를 부러워하는 마음(5-7절)
시인은 절기에 성전을 향해 순례할 수 있는 이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마음속에 그림 하나를 그렸다. 성전에 가닿는 길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는 힘겨운 여정이지만, 하나님이 목마른 광야에서 이른 비의 은택으로 돌보시고 눈물 골짜기를 많은 샘이 솟는 소생의 장소가 되게 하시기에, 순례자는 갈수록 지치기보다 더욱 힘을 얻고 (사 35:9) 안전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장면이었다. 시인은 성전에 이르는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그 순례의 무리 중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가?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을 더 생생하게 만나는 순례의 여정이 되게 하자.
6절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니이다
직역하면 ‘그들이 그것을 샘이 되게 하며 이른 비가 복으로 덮나이다’의 뜻이다.
7절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직역하면 ‘그들은 힘으로부터 힘으로 걸어가’이다.
5-7절。하나님께 힘을 얻는 자의 행복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사랑은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순례자들에게 나타난다. 시인은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 안에서 힘을 얻고 마음에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하는 대로를 품고 있는 자들에게 행복이 있다고 선언하다. 이들은 4절의 성전에 사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성전으로 가는 여정은순탄치 않다. 하나님의 집 성전이 있는 시온이 예루살렘 동편의 산등성이로서, 그곳으로 가는 길에 험난한 산들과 짐승이나 강도 등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이 그들의 길을 지키실 것이므로(시 121: 1-8)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라도 샘에 서 물줄기를 내어줄것이며 그들에게 이른비 를 복으로 덮어주실 것이다(12절). 이와 같은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때 반석 에서 물을 내주시고 그들의 40년 생활동안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억나게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힘을 의지하여 순례의 길을 걷는 자들은 곧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들을 발견할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가?
3•왕을 위해기도하는마음(8-12절)
시인은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 이스라엘의 방패인 왕을 위해 기도한다.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야 성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서의 부귀영화보다 성전 문지기를 더 영광스럽게 여겼고, 단 하루를 살아도 성전 뜰에 거하고 싶었다. 악인들의 편에 선 대가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려도. 정직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화와 좋은 것과는 비교할 수없음을 그는 알았다. 하나님만이 해(생명의 근원)와 방패(참된 안전)이시니, 그분을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믿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는 것이 복이요 생명임을 나도 확실히 믿고 있는가?
10절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직역하면 ‘내 하나님의 집 문지방 지키기를 선호하오니’이며. '성전'은 ‘집'의 번역이다.
“좋다"는 원래 ‘선택하다’,‘선호하다'의 의미다.
“문지기로 있는 것”은 히브리어 “사파프” 부정사 형태를 번역한것으로, ‘문지방(문간)에 누워있다'.‘문지방을 지키다’의 뜻이다.
11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문장 맨 앞에 ‘왜냐하면’ 또는 ‘진실로'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키‘가나온다.
11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정직하게”(타밈는 ‘흠 없는’, ‘온전한•완전한’이란 뜻이다.
“아끼다”(마나)는 ‘보류하다'.’억제하다’.‘망설이다’의 뜻이다
8-9절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위한 간구
이제 시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즉 왕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한다. 문맥상 이 간구가 느닷없이 들리긴 하지만,왕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사랑을 보여줌에는 틀림없다. 9절에 왕을 위한 시인의 기도로 나오는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는 원문에서 ‘우리의 방패’, '보소서’,"하나님’이란 단어들과 순서로 나온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보소서’ 또 는 하나님,우리의 방패를 보소서’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님을 방패로 비유하는 예가 종종 있고(삼하 22:3; 시 7:10; 59:11), 11절에서도 방패로 부르므로 전자의 번역을 따라도 문제가 없다. 후자의 번역을 따른다면 방패는 뒤에 나오는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인 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편 89:19에서도 인간 왕을 방패로 호칭하고 있다. 한편,왕의 얼굴을 살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왕에게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다.
10-12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행복
시인이 성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에 대한 그의 사랑을 표현하는것이다. 그는 ‘A가 B보다 낫다’는 형식을 두 번 이용하여 이 사랑을 표현한다. 첫 번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궁정에 있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보내는 천 날보다 더 낫다고 고백한다. 시편 27편에서도 유사하게 시인이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기를 갈망함을 밝히며, 이것이 자신의 유일한 기도 제목이라고 말한다. 본 시편과 마찬가지로 27편에서도 시인이 성전에 거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아름다음을 앙망하고, 그곳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 표현으로. 시인은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이 설명은 첫째, 하나님의 성전을 악인의 장막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이 계신 곳에 악이나 죄가 있을 수 없음을 암시한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 오는 자는 깨끗하고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함(시 24:4)을 상기시킨다.
둘째,이 설명은 악인과 연루된 곳에서 안락을 추구하기보다는 고달프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 문지기로 있는 게 낫다는 말로 들린다. 다만,이때 ‘문지기’를 성전에서 일하는 공적 직
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문지기’는 하나님께 특별하게 선택받은 레위인들에게 맡겨진 직책 중 사무 보는 자,관리,재판관,찬양단과 같은 직급의 하나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다(대상 23:3-5). 한편 ‘문지기로 있는 것’은 ‘문지방에 누워있는 것’ 또는 ‘문지방에 서있는 것’으
로도 번역이 가능하다.‘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의 의미를 문지기 직책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전 출입의 허가를 얻가 위해 성전 입구에 서있거나 성전문지방에 초 라하게 자리하고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좋사오니”(10절)의 ‘좋다’란 동사는 ‘선택하다’, ‘선호하다’라는 뜻으로 시인의 감정만이 아니라 결단과 의지도 함께 나타낸다. 시인에게 있어 하나님은 “해”와 “방패”와 같다. 해는 하나님의 변치않으심, 은혜, 구원, 호의 등을 의미한다. 방패는 하나님의 보호,도움,힘 등을 뜻한다. 하나님은 흠 없이 사는 자들에게나 흠 없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와 영화 등 좋은 것을 망설임 없이 아낌없이 주실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행복한가! 시인은 그와 함께한 공동체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격려하며 기도를 마친다.
기도_
오, 하나님! 예배하며 경배하는 가운데 제 눈을 당신께 높이 듭니다. 당신의 약속에 초점을 맞추고 당신의 은혜를 기대합니다. 저의 모든 필요와 바람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 앞에 가져옵니다. 아멘.
주 하나니, 당신은 태양이며 방패입니다. 말씀의 빛은 제 경험의 의미를 밝히고, 임재의 힘은 절망에서 저를 지켜 줍니다. 그 말씀을 다시 듣고, 당신의 임재를 재확인할 수 있는 예배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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