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문단나누기
8:6-7 노아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내다
8:8-12 비둘기를 세 번 내어 주다
8:13-14 노아가 땅이 마른 것을 보다
(마 16:1-3)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예수님은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하시면서 시대를 분별할 것을 촉구하셨다.
하나님이 오래도 참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예비한 심판을 행하신다.
노아가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32)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창7:6) 방주 건조기간을 70년 100년 120년을 보는 견해가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창세기 8장은 1절의 첫 절을 중심축을 삼아 극적으로 전환한다 “하나님이 노아와...기억하사” 하나님이 노아를 기억하셨던 것이다. 이것과 가장 근접한 성경구절은 창세 19장 20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개역개정: 생각하사)’이다.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하심이 땅위에 바람을 보내시게 했고, 이 바람은 땅을 말리는 과정을 시작한다. 여기서 물을 말리는데 태양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하나님의 영으로 묘사되는 바람 ‘루아흐’가 물을 억제하면서 장엄하게 운행하셨는데, 이젠 심판의 물을 증발하게 만든다.
[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6절 우리는 여기서 노아가 방주를 떠나려고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노아는 상륙전 모든 것이 안전한지를 확실히 확인하기 원한다. 따라서 그는 옆문이 아니라(6:16),아마도 방주의 지붕이나 옆면에 있었을 뚜껑(hatch.‘할론’)을 연다. 땅이 충분히 말라 그와 다른 사람들이 방주를 떠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노아의 책임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출발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린다(8:15).
“사십 일”은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이게 된(5절) 후부터 새들을 밖으로 보냈을 때까지 노아가 기다렸던 기간만을 가리킬 수 있다. 아마도 노아는 물에 잠긴 땅의 더 많은 부분이 다시 드러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기다린다. 언제까지 입니까? 언제쯤 홍수는 그치고, 우리는 안전지대에 정박하고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것인가? 파도에 휩쓸리는 시간, 하나님이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시간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개인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런 기다림의 시간에 있는지 모른다. 단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할 것인가? 방주에서 노아는 자신이 할 일을 하면서 기다렸다.
우리가 바람을 만들 수 없다. 하지만, 돛대는 세울 수 있다. 바람이 부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겠지만, 바람이 분다한들 우리가 돛대를 준비하지 않는다면 어찌 순풍을 탈 수 있으랴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홍수의 연대기를 추정할 수 있다.
1) 홍수의 고지 (7:4) 10.2.600 일요일
2) 홍수가 시작되다 (7:11) 17.2.600 일요일
3) 홍수가 40일 동안 계속되고서 끝나다 (7:12) 273.600 금요일
4) 150일 동안 물이 불은 뒤 줄어들다 (8:4) 17.7.600 금요일
(40일 동안의 홍수를 포함해서= 방주가 땅에 닿을 때까지 5개월)
5) 산봉우들이 나타나다 (8:5) 1.10.600 수요일
6) 까마귀를 내보내다(40일 후) (8:6) 10.11.600 일요일
7) 비둘기의 두 번째 비행 (8:10) 24.11.600 일요일
8) 비둘기의 세 번째 비행 (8:12) 1.12.600 일요일
9) 물이 걷히다 (8:13) 1.1.601 수요일
10)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다 (8: 14) 27.2.601 수요일
하지만, 노아는 어떻게 알겠는가? 하나님이 홍수에서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한다는 약속하나만을 믿고 있다. 그것이 노아의 믿음이었다.
(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우리도 알지 못하는 것이 많지만, 하나만은 확실히 알아야 한다.
(롬 8:26-28)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8]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9]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10]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11]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12]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7〜12절 노아는 땅이 거주하기에 적절한지를 가늠하기 위해 먼저 까마귀를 보내고,이어서 비둘기(3회 [8. 10, 12절])를 보냈다. 따라서 모세(민1 3 3)와 여호수아(수 2 :1)는 필요한 정보를 입수해서 다시 돌아올 정탐꾼들을 “보냈다”(•샬라흐’의 칼형).
‘샬라흐’의 피엘형은 창세기 3장23절의 “여호와 하나님 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히.•바예샬헤후’)”에서처럼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추방을 의미할것이다.
이것을 7장 7〜12절에 적용하면 노아는 새들을 시험삼아 내보낸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노아는 이 새들이 방주에 있는 그들의 둥지로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노아가 땅의 상태를 가늠하기 위해 새들을 내보내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지금까지 노아는 모든 정보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땅의 부패에 대해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을 것과 그 방주에 들어갈 대상을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임박한 폭풍에 대해 알려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 다시 땅에 살 수 있는지를 노아에게 말씀하시지 않는다. 실제로 노 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이 노아에게 주시는 모든 계시가 그치고, 8장 15절에서 다시 말씀하실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노아는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조류학(또는 징조)에 의지해야 한다. 창조주가 노아에게 말씀 하시고, 그와 마찬가지로 피조물도 노아에게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로서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지만,모세에게 재판 문제를 관리하는 가장 좋고 효과적인 방법에 대해 정보를 제공한 것은 모세의 장인이다.(출 18장) 여호수아는 하나님에게서 모든 땅을 받게 될 것이라는 직접적인 약속을 받지만(1장)그럼에도 그는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와서 자신에게 보고해 줄 정탐꾼들을 보낸다(수2장)
노아에게는 항해를 위한 장비나 선원이 전혀 없었다. 이런 요소들의 부재는 의도적인 것이다. 이런 요소들의 부재를 통해 성경의 기록은 이런 생략을 통해 만약 노아가 물에 빠져 죽지 않고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증명하게 된다. 노아에게는 기술을 겸비해서 폭풍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전문적인 선원이 없었다. 그러나 방주에 창문(별점을 치기 위함)과 새들(방향 찾기를 도와주는 회귀성 있는 비기)이라는 항해 장비가 있었음이 암시적으로 나타난다.
성경의 홍수 이야기의 이 부분이 바벨론의 길가메시 서사시와 흥미로운 병행을 이룬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우트나피쉬팀의 배가 니시르 산에 도착한 후 일곱째 날에 우트나피쉬팀은 다음과 같이 행한다.
“읽고 쓰는 것이 가능해지기 이전 시대의 고대인들이 일곱 바다를 항해 했다면 그들은 항해를 가능하게 해 주는 과학과 기술을 가지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과학과 장비에 대한 현대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면, 성공적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해 줄 다른 방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방향을 찾기 위해 회귀본능을 지닌 비둘기를 새장에 가득 넣어 가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성경은 노아가 먼저 까마귀를 내보내고 이어서 비둘기를 내 보냈다고 되어 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산봉우리에서 먹을 음식을 찾았기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다. 비둘기는 계곡에 사는 새이고, 거주할 수 있는 더 낮은 지대가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날려 보낸다.
까마귀는 검을 뿐만 아니라 부정한 것이기도 하다(레 11:15: 신 14:14). 따라서 그것이 노아에게 아무런 위안도 가져오지 않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에 대한 언급은 메소포타미아 전승(참조. 길가메쉬 서사시 11:152-54)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죽지 않았음을 지적할 것이다. 그것들은 부정한 것이었기 때문에 방주에는 두 마리의 까마귀만 있었다. 따라서 그 종(Species)이 살아 남으려면 두 마리 다 살아 있어야만 했다. 까마귀가 땅이 “마르기” 까지 계속해서 날고 있었던 것에 주목하라. 땅이 마른 다음에야 노아는 방주에서 나왔다 (8:14).
비둘기는 전혀 다른 새였다. 그것은 희고 제사에서 자주 사용되는 정결한 짐승이었다(예를 들어, 레 1:14: 12:6 등). 다른 희생 제사 짐승들처럼 그것은 이따금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보여졌다(호711:11:11). 따라서 이 기사 내에서 그것은 노아 자신의 이상적인 대리자이다. 여기서 비둘기의 임무에 관하여 진술한 목적은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는것”이다.
새들이 보통 그것들의 둥지로 돌아오는 저녁 때 감람나무 잎사귀를 문 비둘기의 귀환으로 정점에 이른다. 감람나무(올리브나무)의 발견은 분명히 매우 상서로운 것이었다. 팔레스틴에서 가장 흔한 나무들 중 하나이며, 귀중한 기름이 나는 감람나무는 미와 풍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제사의 다른 많은 재료들처럼(레 2장) 감람나무도 이스라엘을 상징했다(렘 11:16)
그 발견은 그 잎사귀가 “갓 따진”(타라프)것이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그것은 식물이 사람과 짐승이 바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다시 자라고 있으며(참조. 1:30), 또한 “지면에 물이 걷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지막 말은 비둘기가 그것의 임무를 완수했음을 나타내며, 다음번에 내어놓을 때는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견케 한다.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3-14절은 모두 땅이 말랐다고 말한다. 13절에는 ‘습기가 없다’는 의미의 ‘하라브’를 사용했다. 14절에는 완전이 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야바쉬’를 사용한다. 창세기 1장에 사용된 “야바샤(마른 땅)”과 관련 있다. 홍수로 파괴되었던 창조가 이제 표면을 새롭게 하고 있다. 얼마 전에 뒤집어진 창세기 1장의 세상이 이제 스스로 바로잡고 있다.
둘째,두절은 서로 다른 날짜로 시작한다. 13절은 601년 첫째 달 첫날(즉 새해 첫날)로 시작하고,14절은 601년 둘째 달 스물일곱째 날로 시작한다. 홍수 사건에서 이 마지막 날짜를 처음의 날짜(7:11)와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홍수 시작(7:11): 노아가 600세 되던 해 둘째 달 열일곱째날
홍수 종료(8:14): 노아가 601세 되던 해 둘째 달 스물일곱째날
홍수는 “12개월 11일 동안 지속되었는데, 1년을 354일로 하는 열두 달로 된 태음력을 적용하면 이 기간은 정확하게 1년을 365일로 하는 태양력의 1년과 동일하다.” 홍수는 태양력으로 1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 두 절에서 볼 수 있는 셋째 비교점은 각 절의 독특한 관점이다. 13절은 땅이 마른 것을 다음과 같이 노아가 관찰한 것으로 기록한다. “노아가……본즉.” 14절은 같은 결과를 기록하지만, 여기서는 객관적인 보고 진술이다.
아담에서 노아까지의 계보
5:1-5 아담 5:18-20 야렛
5:6-8 셋 5:21-24 에녹
5:9-11 에노스 5:25-27 므두셀라
5:12-14 게난 5:28-31 라멕
5:15-17 마할랄렐 5:32 노아
우리는 종말의 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벧후 3:8-13)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앤더슨(B. W. Anderson. JBL 97[1978] 38)은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한다.
과도기적 도입부(6:9-10)
1. 피조 세계의 강포(6:11-12)
2. 첫 번째 신의 담화: 멸하기로 결심하심(6:13-22)
3. 두 번째 신의 담화: “방주로 들어가라”(7:1-10〉
4. 흥수의 시작(7:11-16)
5. 불어나는 물(7:17-24)
하나님께서 노아를 권념하심
6. 줄어드는 물(8:1-5)
7. 땅의 마름(8:6-14)
8. 세 번째 신의 담화: “방주를 떠나라”(8:15-19)
9. 질서를 보존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8:2022)
10. 네 번째 신의 담화: 언약(9:1-17)
과도기적 종결부(9: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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