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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욥기 6장 14-30절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욥은 고통받았다. 그의 이름은 고통과 동의어이다. 그는 묻는다. “? 나입니까?” 그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 끈질기게, 열정적으로, 그리고 설득력 있게 던진다. 그는 침묵을 거절한다. 진부한 말도 거절한다. 욥은 십자가에서 힘들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27:46)라고 질문 던지신 예수님의 선례를 남겼다.

 

(15:33-35)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35]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욥은 자신의 고통을 조용하게 혹은 경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른 의사나 철학자를 찾아가 보는 것을 그는 경멸한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꿋꿋하게 자기 생각을 밝히고, 고통에 저항할 때 자기를 위로하러 찾아온 세 친구들 앞에서는 심하게 저항했다.

 

지금은 욥의 절망감이 합당한가 아닌가를 따질 때가 아니다. 그의 신학이 옳은가 그른가를 따질 때가 아니다. 그저 다가서서 손을 붙들어 주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 주는 이가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그의 고통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다.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메시지 성경 번역본으로 읽어 보면 이렇다.

 

절박한 처지의 사람이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접을 때

그의 친구들만은 곁에 있어 줘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형제처럼 여긴 내 친구들이 사막의 협곡처럼 변덕스럽군,

어떤 때는 눈과 얼음이 녹은 물을 산에서

콸콸 흘려 보내다가도

한 여름이 되면 햇볕에 바싹 마른 골짜기로 변한, 딱 그 짝이야.


 

1/ 와디와도 같은 친구들

(14-17)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공감이야 말로 인간됨의 척도이다. 역지사지의 마음이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상황이 변했다고 입장과 태도를 바꾸는데 욥이 볼 때 그것이 무슨 우정인가 하는 것이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는 말이 있다. 볕 좋은 날에는 가까이 지내고, 흐른 날에는 멀어지는 것이다.

 

16절부터 18절까지는 바로 그런 상황을 유려한 문장으로 그려내고 있다. 욥은 지금 광야길을 걷다가 마른 목을 축이려고 기억에 의지하여 그 개울을 찾아온 데마의 대상이나 스바의 행인’(19)의 실망 혹은 절망감을 맛본다.


여행자들이 마실 물을 기대하고 힘들게 왔다가

결국 바싹 마른 협곡에 이르러 갈증으로 죽는다네.

데마의 대상들이 물을,

스바의 관광객들이 시원한 음료를 고대하며

부푼 가삼을 안고 당도했건만,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실망뿐!

그곳에 도착한 그들의 얼굴이 낙심으로 흐려지네!

그런데 내 친구라는 자네들이 바로 그 꼴이야.

전혀 다를 게 없어!( The MSG 욥기)

 

2/ 갈급한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개울

(18-20)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3/ 친구들을 향한 욥의 비난

(21-23)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그는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재물을 달라고도 위험한 적들의 손에서 구해달라고도 말이다. 그런데도 친구들은 마치 욥을 더러운 오물로 보 듯하고 있다. 마치 그를 비난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옮겨올지도 모를 재난을 피하는 방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 몰골을 한번 보더니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군.

내가 자네들에게 무슨 부탁을 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돈 한푼 달라고 하기를 했나.

날 위해 위험을 무릅써 달라고 했나.

그런데 왜 이리 말을 돌리고 발뺌하기에 급급하나?

 


4/ 친구들을 그릇된 책망

(24-27)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할 바른 말은 고난을 설명하거나 정죄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잘잘못을 떠나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냥 더불어 있음을 표시하는 존재의 언어이다. 그 말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는 표시다. 있음이요, 곁에 있음이다. 그처럼 누구 곁에 있음으로 사람은 가장 있음을 겪는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고난 받는 자 앞에서 말에 너무 내용을 실으려했다.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 되고, 결국 욥을 책망하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사람의 말꼬투리를 잡아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고난 받는 자의 울부짖음은 말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은, 충만한 언어가 될 수도 있다. (양명수, 욥이 말하다, 분도출판사, 66-67쪽)

 

 


5/ 친구들을 향한 권면

(28-30)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절망한 자가 쏟아내는 말 그 자체에 집중하면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말을 쏟아낼 수 밖에 없는 속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옳은 말이다. 바른 말은 가르고 정죄하는 말이 아니라, 감싸주고 일으켜 세우는 말이다.

 

욥은 자신이 친구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속임수를 쓰겠느냐 묻는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욥은 친구들이 그릇된 길로 많이 빗나갔음을 상기시킨다. 또한, 자신의 의가 여전히 건재하며 자신의 혀와 입에 불의와 속임수가 없음을 밝혀준다. 욥은 주님이 자신의 의로움을 밝혀주길 바란다.

 

 


 

그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반응하지 않는다고 불평한다. 자신의 무죄를 확신하는 욥은 갑갑하다.

(9:32-33) [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33]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친구들이 욥에게 조언을 하려고 하자 상황은 악화된다. 그들을 돌팔이 의사그리고 비참한 위로자들이라고 부른다.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16:2)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그는 아내, 친한 친구, 손님, , 형제,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자기에게 등을 돌렸다고 불평한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편에 서서 그에게 대항했고, 이제 그 자신은 간신히 살아남았다.

(19:20)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몸 뿐이로구나

 

그러나, 이러한 배척 앞에서도 욥은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19:25-27) [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엘리바스는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흑백 논리의 근거로 삼으려 하는 근본주의자이다. ‘욥의 고난은 그에게 죄가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만큼 확실한 것은 어디 있는가욥의 친구들이 이렇다.

빌닷의 논리의 핵심은 이렇다.

(25:5-6) [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빌닷은 하나님을 확대하면서 인간을 축소시킨다. 지성인 빌닷에게 절망하고 고통받는 불쌍한 사람보다 더 중요한 생각거리들이 많다.

소발은 도덕주의자이다. 그는 욥에게 충고한다.

(11:13,17) [13]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7]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엘리바스는 회개만 강조하는 근본주의자, 빌닷은 사상만 거창한 지성인, 소발은 자기 의에 빠진 도덕주의자이다.

 

거기에 한 사람 더 있다. 엘리후이다. 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아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세 친구의 말이 마치자 엘리후가 입을 연다.

(32: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32:19-20)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그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그러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친구들의 조언과 욥의 반응을 다 들었는데, 모두가 별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엘리후의 긴 말도 새로울 게 없다. 욥은 그의 친구들은 엘리후를 무시한다.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38:1-3)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38:4-7)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6]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7]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욥은 폭풍 중간 즈음에 대답한다.

(40:4-5) [4]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5]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욥은 다시 한번 폭풍 마지막에 말을 쏟아낸다.

(42:3,5)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 하나님의 61가지의 질문들은 우리의 합리화오 고통과 무지를 뚫고 들어와 우리 주변과 우리 안에 있는 창조와 구원의 세계에 눈뜨게 한다. 욥과 함께 우리도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귀로만 들었지만, 이제는 제 눈이 주님을 뵙습니다.”고 말하게 해준다.

 

_유진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양혜원 옮김, 복있는 사람,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