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에서 친구들 가운데 연장자 엘리바스가 욥을 닦달하는 대목을 보았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느냐 9욥 4:7)’,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하는 자가 있겠느냐? (욥 5:1)’ 그의 말투는 점잖으나 그 속에는 듣는 이의 가슴에 생채기를 낼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신랄한 말도 아프지만, 점잖은 체 하는 말이 더 아플 때도 있다.
1/ 욥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1-3절)
[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2]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3]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했던 욥에게 외로움의 무게까지 얹혀졌다. 마주 잡을 손인 줄 알았던 벗들의 손이 그를 밀쳐내고 있다. 성좌에서 떨어져 나온 별처럼 어둠의 공간에 홀로 유영해야 한다. 폴 틸리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구별한다. 쓸쓸함이 홀로 있음의 괴로움이라면,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론적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달아나곤 한다. 파스칼은 말한다. “우리의 불행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방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기도하셨다. 그 외로운 시간은 우리 존재를 영원한 중심에 비끌어매는 시간이 된다.
고난을 겪는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때로 본인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주관적이기에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욥이 말하듯 그 괴로움은 바다의 모래같이 거대하다.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은 종족 지나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 잘 믿으면 아무 일 없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 믿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난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클 수 있다. 이럴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을 불신하게도 된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듯 느껴지고 자신이 홀로 있어 사탄과 악한 영적 세력이 마음대로 괴롭히는 것 같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한다.
오죽하면 욥이 이런 말을 할까? 전능자의 화살->독-> 두려움으로 이끌어지는 이 숨가쁜 진행을 보라.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것 같은 쓸쓸함을 그런 말로 드러낸다.
2/ 하나님의 화살공격(4-5절)
[4]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5]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3/ 엘리바스의 역겨운 교훈(6-7절)
[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7]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은 극단적 괴로움으로 살맛을 잃어버렸다. ‘~하겠느냐?’라는 말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된다. 전능자의 화살을 맞아 영혼에 독이 퍼진 자의 절망이 도드라지게 강조된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설게 보인다. 친밀함이 소원함으로 바뀐다. 빛은 어둠과 자리를 바꾼다.
엘리바스는 욥이 싫증내며 힘들어 하고 놀란다고 힐책했다. 욥은 엘리바스 말이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충고로 봤다. 풀과 꼴이 없는 들나귀와 소 같은 자가 바로 욥이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비판만 한다면, 그 비판이 설사 옳은 내용이라 해도 수용하기 어렵다. 이는 욥에게는 소금 없이 먹는 싱거운 것처럼 꺼려진다.
누군가를 위해 울어 준 적이 있는가? 그 고통과 상실한 마음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해 슬픔을 나누어 준 적이 있는가? 우리가 몸된 교회의 지체라면 그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잃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4/ 고통 중에도 기뻐하는 욥(8-10절)
[8]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참 슬픈 소원이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하고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을 위로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다 쇠약해진 욥은 여전히 죽음에의 이끌림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한 가지 자부심이 남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7]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18]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 23:17-18』
5/ 죽음을 사모하는 이유(11-13절)
[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멸하셔서 끊어 버리시기를 간구하며 소원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는 위로를 받고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욥은 하나님 곧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의 고통은 견딜 수 없다. 욥은 자신에게서 기력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돌도, 놋쇠도 아니기에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우리가 살다보면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때가 있다.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겪는 일이다. 불신자와 신자의 다름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두는 것이다. 끝내는 하나님의 도움과 능력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기다림에도 힘이 필요하다. 기다림의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것은 희망이다. 그것이 비록 막연하다고 해도 그렇다. 기다림이 큰 설렘 일 때도 있다.
시편 73편에서 나는 거의 미끌어질 뻔 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다고 한다.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 때문이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그 분의 지성소로 들어가자.
'욥기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주주약교회 수요설교 #욥기 7장 '사람이 무엇이기에' 김광영목사 (0) | 2021.11.04 |
---|---|
욥기 6장 14-30절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0) | 2021.10.28 |
욥기 5장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은 인생 (0) | 2021.10.14 |
욥기 4장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엘리바스의 담화) (0) | 2021.10.07 |
욥기 3장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의 탄식) (0) | 2021.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