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이 고난을 겪는 이유(1-7절)
엘리바스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죄없다고 탄식하는 욥에게 분노와 시기를 그치고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의 멸망을 피하라고 한다. 고난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라고 엘리바스는 말한다.
일단 말의 순환논리에 빠지면 좀처럼 거기서 벗어나기 어려운 법이다. 엘리바스의 말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1]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2]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
대꾸할 말이 없이 정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다. 구구절절 옳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지 말자. 이게 과연 무슨 소리인가? 한 마디로 욥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말이다. 욥은 졸지에 ‘미련한 자’,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 욥이라는 구체적 존재는 사라지고 욥으로 표상되는 추상성만 남게 되었다. 혈과 육을 가진 욥,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욥이 소거되고 남은 자리에 싸늘한 이론만 남았다는 말이다. 이론이라 하지만 이것은 사실 자기의 감성에 바탕을 둔 편견인 억견일 뿐이다.
우정은 이렇게 어긋나고 있다. 그는 어리석은 이의 뿌리가 순식 간에 뽑히고, 그의 집이 순식간에 망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의 자식들은 거렁뱅이에다가 외돌토리가 되어서 어디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을 거라고 내처 말하고는 자기의 탁견에 방점을 찍듯 말한다.
[5]그가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덫에 걸린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6]재난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며 고생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니라
재난과 고생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라는 말은 ‘인생은 고해’라는 말과 유사하다.
욥은 이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가 감내해야 했던 심적, 육적 고통에 죄인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낙인효과’이다. 일단 어떤 사람을 나쁘다 낙인찍으면 상황이 변해도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낙을 찍는 이들의 심리 속에 들어있는 것. 자신의 도덕적 정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엘리바스의 경우 마찬가지이다. 그는 신실한 신앙인의 모습이 되어 욥에게 충고하다.
엘리바스는 욥이 당한 재난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본다. 징계란 아직 희망이 있는 자에 대해 가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 살피고, 그 훈계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오직 의지할 데는 하나님 밖에 없다고 말이다.
2/ 하나님을 찾을 때 일어나는 일(8-9절)
엘리바스는 욥이 자신의 죄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이다. 이 상황에 하나님을 찾고 온전히 의탁하는 회개를 하라고 한다.
[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나라면’이라는 단어가 참 묘하다. 우리도 이런 말을 종종한다. 이 말 속에는 이미 상대방에 대한 무시 혹은 구분짓기의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엘리바스의 말은 단정적이다.
욥이 처해 있는 상황이 ‘전능자의 징계’에서 비롯된 것인데, 하나님이 개입하여 바로 잡아주시니 얼마나 큰 복이냐는 것이다. 말이야 참 은혜롭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렇게 들리겠는가? 어쩌면 욥은 납득할 수 없는 현실,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앞에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었을 테니까.
3/ 연약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10-16절)
[10]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11]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애곡하는 자를 일으키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느니라
[12] 하나님은 교활한 자의 계교를 꺾으사 그들의 손이 성공하지 못하게 하시며
[13] 지혜로운 자가 자기의 계략에 빠지게 하시며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므로
[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15]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강한 자의 칼과 그 입에서, 또한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주시나니
[16]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희망이 있고 악행이 스스로 입을 다무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게 자연과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도덕적 다스리심을 보라고 한다. 죄없이 가난한 자는 반드시 구원 받고, 간고한 지혜로 악행하는 자는 심판 받는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그의 강함과 교만을 회개하고, 낮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한다.
4/ 범죄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17-18절)
[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엘리바스는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 복되다 한다. 그분은 상하게도 하시지만 고치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욥이 지금 겪는 환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징계를 겸손히 받으라는 것이다 엘리바스 말은 한편으로 진리를 말하나(호 6:1), 욥의 상황에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 욥의 고통은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ㅁ라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욥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바스의 연설은 계속된다. 그의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하시는 분이다. 땅에 비를 내리시고, 밭에 물을 주시는 분이고, 낮은 사람은 높이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보장해주시고 간교한 자의 계략을 무너뜨리시는 분이고, 가난한 이들을 강자들의 폭력에서 지켜주시는 분이다.
고난이 없다면 정신 차릴 기회도 없이 무지한 채 세상을 마감하지 않겠는가? 고난이나 징계가 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하나님을 새롭게 보고 더욱 신앙이 깊어져서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여 복된 삶을 누릴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오히려 아무것도 방해받지 않고 좋은 그림을 새로 그릴 수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뜻만 명백해진다면 말이다. 물론 답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답답함을 털어놓은 분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은 전능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선하시니까 그 앞에 가서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지 않은가(5,8).
그러나 문제가 있다. 과연 고난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인가. 사람을 바로잡아 축복하기 위해 고난을 주는 것이라면, 고난이 하나님의 축복의 수단이라면, 하나님은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그 고난에 사람이 그냥 주저앉아 멸망해 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돌이키나 아니나 지켜보고 있다가 돌이키면 축복을 주는 그런 하나님인가. 그 무시무시한 재앙을 내게 가져다준 분이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그 하나님에게 다시 의지하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일어나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고난은 하나님이 주는 징계가 된다. 하나님이 주는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좋은 분이니, 그 벌을 통해 사람을 더욱 성숙시키려고 하실 것이다.
그처럼 고난에 대한 엘리바스의 추리에는 세 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인간의 악함,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 결과 고난은 하나님이 사람을 성숙시키기 위해 들어 쓰는 징계 수단이 된다. 사람이 자초한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 된다. 그러나 징계란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5/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19-23절)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22] 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 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엘리바스는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구원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여섯가지 환난과 일곱가지 환난 중에도 회개하는 자를 구원하신 다는 것이다. 멸망과 기근을 비웃게 될 것이며 들짐승을 두려워히 않게 될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 위로가 적절한가? 도리어 절망을 가중시키는 아픈 말에 불과 하지 않는가? 욥이 무슨 죄를 범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이 아니지 않는가?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은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눈시울이 시큰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엘리바스의 말은 거북이 등처럼 쩍쩍 갈라진 마음에 내리는 단비이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이 말씀과 만나는 순간 큰 위안을 얻게 될 것이다. ‘혀의 채찍’이라는 단어가 있다.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지당한 말씀은 오히려 상처에 뿌리는 소금일 수 있다. 평소에는 축복처럼 들리던 말이 어떤 때는 비수처럼 살을 파고들기도 하니 말이다. 때로는 언어가 소통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6/ 회개하는 자에 대한 회복의 약속(24-27절)
[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손이 땅의 풀과 같이 될 줄을 네가 알 것이라
[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마치 곡식단을 제 때에 들어올림 같으니라
[27] 볼지어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
마지막으로 엘리바스는 회개한 자는 회복될 것이라 한다. 그 후손이 다시금 땅의 풀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한다. 그 생의 마지막은 풍성한 알곡을 가지고 들려질 곡식 단 같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욥이 당한 고난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위로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는 말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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