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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욥기 3장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의 탄식)

 

  운문체로 되어 있는 욥기의 논쟁 부분31426은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는 욥과 세 친구사이의 대화와 논쟁331, 엘리후의 말3237, 하나님의 답변381426으로 구성되어있다. 욥과 세 친구사이의 대화와 논쟁3311논쟁314, 2논쟁1521, 3논쟁2231 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 논쟁은 엘리바스. 빌닷, 소발 등의 순서로 이루어지고, 욥이 그들 모두에게 번갈아 가면서 차례대로 응답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욥은 첫번째 논쟁의 서두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신의 비참한 신세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는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신앙을 고백하던 서론 부분과 큰 대조를 이룬다.

 

1생일을 저주하는 욥110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2] 욥이 입을 열어 이르되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욥기의 독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욥을 보며 이중적 감정을 느낀다. 하나는 경탄이다. “믿음의 사람은 범인과 다르구나”. 다른 하나는 저항감이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흔들림조차 없다는 게 말이 돼?” 2장까지의 욥은 우리에게 낯설었다.

하지만, 3장에서는 어조가 달라진다,. 3장부터는 운문체 문장이다. 운문은 글의 속도감, 리듬이 중요하다. 압축과 생략이 많다. 시는 읽기 어렵다는 게 그때문일 것이다.

욥이 말문을 연다. 그것은 말이라기 보다 울부짖음이다. 하나님을 저주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저주한다. 욥의 존재는 깊은 나락에 떨어진다.

 

[1]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계속 묵상하던 중 정신을 잃을 정도의 큰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1:212:10에서 놀라운 신앙을 고백했던 그가 순식간에 돌변 해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게 사람이다. 그도 우리처럼 살과 피를 가진 사람, 상처입기 쉬운 영혼이었다. 욥이 이토록 자기의 상처 입은 영혼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고통과 슬픔에 깊이 공감해준 벗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재산이 스러진 것은 그렇다 쳐도, 생때같은 자식들이 졸지에 불귀의 객이 되고, 가깝던 이들조차 낯선 이로 변하고 연민에 찼던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경멸로 바뀌어 가고, 삶의 전망조차 불투명할 때 자기 생을 무겁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욥의 피울음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온다. “~더라면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9절까지 계속된다. 한번 다시 읽어보자.

 

[3] 내가 난 날이 멸망하였더라면, 사내 아이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더라면,

[4] 그 날이 캄캄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않으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추지 않았더라면,

[5]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하였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더라면, 흑암이 그 날을 덮었더라면,

[6] 그 밤이 캄캄한 어둠에 잡혔더라면, 해의 날 수와 달의 수에 들지 않았더라면,

[7] 그 밤에 자식을 배지 못하였더라면, 그 밤에 즐거운 소리가 나지 않았더라면,

[8]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리워야단을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이 그 밤을 저주하였더라면,

[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눈으로 볼 때와 낭독할 때가 분명 다르다. 마치 각혈하듯 왈칵왈칵 쏟아지는 문장이 우리를 욥의 고통 속으로 깊이 끌어들인다.

이 모든 어구들이 9절의 말미에 나오는 좋았을 것을이라는 구절에 걸린다.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이의 탄식이고 절규이다.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여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음이로구나

 

새번역은 좀 더 실감나게 번역했다.

어머니의 태가 열리지 않아, 내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건데, 그래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아야 하는 건데부질없는 한탄이다. 하지만 어찌 터져 나오는 한탄을 막을 수 있으랴!

 

특히, 4절에서 욥은 창세기 1:3의 창조 명령을 뒤집어엎는 듯한 언어를 사용해서. 문자그대로 빛도 그날을 비추 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탄식한다. 그는 하나님이 위에 서 자신을 돌아보시지도 않고, 또 그날에 빛조차도 비추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탄식하면서. 도리어 자기 생일이 혼돈의 어둠 속에 삼킴을 당했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울부짖는다.

이러한 탄식은 그날이 어둠 과죽음의 그늘이 지배하는 날이요, 구름과 흑암과 캄캄한 어둠이 뒤덮어 버린 날, 그리고 해의 날수와 달의 수에도 들지 않는 날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탄식으로 이어진다.

 

두 차례에 걸쳐서 사탄은 욥이 재앙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대놓고 저주할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1:1125. 그러나 욥은 두 차례 모두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었을 때에는 121의 고백을 했고, 자기 몸에 무서운 피부병이 들었을 때에는 210의 고백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재앙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무너졌을 때조차도 그는 하나님을 대놓고 저주하거나 비난하는 대신에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적이 있다201418. 비록 욥과달리 그가 남왕국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가혹한 심판을 선포한 것 때문에 왕을 비롯한 지배 계층과 동족으로부터 온갖 고통과 박해를 겪은 탓에 자신의 생일을 저 주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욥이나 예레미야가 생일 을 저주한 것은 불의한 감정이나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깊은 경건에서 비롯된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2태어날 때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탄식1119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3절에서 10절이 태어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울부짖음이었다면, 11절에서 19절까지는 태어난 다음에 바로 죽었기를 바라는 말들이다.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죽음도 모른다. 그러나 태어난 다음에 삶을 피하는 방법은 죽음이다.

11절부터 17절을 이끄는 단어는 어찌하여이다. “어찌하여”, “언제까지나이런 단어와 더불어 탄식시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 인식의 장벽과 삶의 장벽에 부딪힌 이들 속에서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 같은 단어이다.

루마니아 철학자 에밀 시오랑은 이런 고백은 했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불행이도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어머니가 해산할 때 죽어서 나왔더라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고통을 겪지 않았을 거라는 욥의 절규가 참 아프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와 같은s 심정에 사로잡힌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지옥은 한순간도 자기 자신을 잊을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마르틴 부버는 신과 인간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어 신의 현존을 느낄 수 없는 상태를 신의 일식이라 불렀다. 신은 계시지만 너무 멀리 계신 것이다. 욥에게 고통이 되는 것은 다가올 죽음이 아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그는 죽음을 소망한다. 그에게 죽음의 세계는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는 곳이다.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의 탄식은 자학과는 다르다. 자학은 과도한 죄의식에서 나온다 과도한 죄의식은 어떤 욕망과 욕심이 살아 있을 때 생긴다. 그러나 이제 욥은 인생의 모든 미련을 버린 사람이다. 가진게 많으면 더 가지려 하겠지만, 이제 가진 것이 모두 사라진 지금 욥은 모든 욕심을 버렸다. 소유물과 함께 소유욕도 사라졌다. 고난에서 생긴 허망함에서 얻은 덤이다. 욥은 자신의 생을 저주했지만 자기를 학대한 것은 아니며, 자기의 지난 삶을 어리석게도 탓하지 않았다.

 

 

3고통의 의미에 대한 질문2026

 

[20] 어찌하여 고난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아픈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죽음을 구하는 것을 더하다가

[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은 희망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 같다. 그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말없이 곁을 지켜줄 벗들이다.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주고,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주는 벗들.

우정이란 비를 맞고 있는 이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산을 내어 던지고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욥에게는 친구의 불행 앞에서 칠 일 밤낮을 함께 울어준 벗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이 우산을 내던지고 욥과 함께 온전히 비를 맞았는가? 그들은 오히려 우산을 접어 욥을 두들려 팬다. 가죽이 벗겨진 그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려댄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욥의 불행을 함께 아파했을 때 그들은 친구였지만, 그의 불행을 해석하려는 열망에 사로잡혔을 때 그들은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