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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욥기 1장 13-22절 땅에 엎드려 예배하는 욥

 

 

  “태산을 넘어 험 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찬송가 가사이다. 우리 삶도 그렇다. 하루 하루 사는 게 태산이다. 산 너머 산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산을 넘어 지평이 보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더 높은 산 첩첩산중이다. 코로나 19가 안겨준 이 땅의 신음소리 자영업자들의 탄식소리, 추석이지만 마냥 즐거워할 수 없다.

  이러한 때 욥기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모진 고난 속 믿음을 지킨 신앙의 영웅으로만 보아도 되는 것일까? 평온하던 일상 일진광풍처럼 몰아친 시련으로 풍비박산 난 후 그는 오늘의 고백을 하였다. 참으로 어려운 고백이다.

 

 

 ( 베리트 작은오케스트라의 찬양과 설교자의 음성을 보완하여 새로 올린 영상)

    

 

 

 

  차라리 우리에게는 출애굽의 광야 길에서 백성들의 원망이 더 이해가 된다.

(17:1-3)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고난에 처한 사람은 벼랑길을 어지럼증과 싸우며 한걸음씩 걸어 갈 뿐이다. 어차피 정답이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럼에도 살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우리는 살아야 한다. 삶의 힘을 잃고도 견디고 살아야 한다. 길고 어둔 터널 저편 밝은 풍경과 만나리라는 기대를 품고서 말이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가 되는 일이 잇따른다’- 좋은 일에는 마()가 끼고, 방해하는 일이 많다-는 말이다. 시련과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만, 살다보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불청객처럼 찾아온다. 그 불청객으로 인생이 영 망가지고 마는 이들도 있다. 거듭되는 시련에 정신이 아예 물크러져서 주체로 서지 못하고 물결치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이들이 많다. 욥은 어떤 사람이었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된다. 불행이 밀어 닥치기 시작한다. 사람은 누구나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아이들 키우는 부모는 자식에게 무슨 일 닥치지 않게 매우 조심스런 마음을 가진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 그 행복이 달아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도 동시에 가진다. 가끔은 최악의 시나리오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욥에게 그런 일이 밀어닥쳤다.

(3:23-25) [23]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24] 나는 음식 앞에서도 탄식이 나며 내가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 같구나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모든 불행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갑작스러운 일이다. 뜻밖의 일이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도 실제로 내게 닥치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뜻 밖에서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영문을 알 수 없는 시련이 욥을 엄습한다. 시련은 언제나 행복한 시간에 찾아온다. 욥은 잔치 자리에서 불행한 소식을 듣게 된다.

종들이 몰려온다. 첫 번째 사환스바 사람들이 들이닥쳐 가축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보고한다. 다른 종이 들어와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양 떼와 목동들을 살랐다고 한다. 설상가상이다. 또 다른 종들이 허겁지겁 달려와 갈대아 사람들이 나타나 낙타를 빼앗고 종들까지 죽였고 한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의 징표였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 안개가 흩어지듯 사라진다. 창졸간에 당한 일이기에 욥이 넋이 빠졌다. 그때 가장 큰 타격이 찾아온다.

광야에서 강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져 욥의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 생떼 같은 자식들의 죽음이 욥에게 가한 타격은 컸다.

 

갑작스레 찾아오는 불행은 파괴적이기 때문에 사탄적이다.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린다. 찢겨진 옷은 조각난 그의 마음이요, 민 머리는 무방비 상태를 상징한다.

 

욥의 이전상태와 나중상태의 대조가 참으로 극적으로 묘사된다. 왜냐하면 그 재난을 알려주는 것은 단순히 사건들의 연결이지 복잡한 결과들로 된 사슬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시작하는 문장은 4절에서 이미 그려진 욥의 자녀들의 근심걱정 없는

삶을 다시 서술하며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재난을 알리는 첫 번째 사자가 오기 바로 전까지 아직 평온하고 악을 예상치 못하고 있는 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초점이 재난들 자체가 아니라 전적으로 욥에게 있음은 전적으로 욥을 중심으로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극의 전개상 집중 조명이 욥에게 고정된 채로 머무는 이유는. 욥 자신이 그 재난들을 알아채는 정도까지만 본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 장치는 재난의 장면들보다는 놀랍도록 욥에게 중점을 두면서동시에 파멸이 가속되는 분위기를 창출한다.

첫 번째 이 후로 매 사자는 그 앞에 온 사자가 말을 마치기 전에 도착한다. 각 사자는 그가 묘사한 재난의 유일한 생존자다. 사자들이 끊기지 않고 연속적으로 오는 것은 듣는 이가 욥의 반응에 관해 느끼는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욥은 재난들 모두에 한꺼번에 실제로는 그 모든 참화들이 구상과 결과에 있어서 동일한 재난이기 때문이다.

스바인들의 습격의 목표는 약탈이기 때문에그들이 농부들을 살해한 것은 욥의온 식솔을 포함하여(2) 욥의 소유 전체를 제거하기 위한 극적 필요에서 생긴 뜻밖의 세부 묘사이다. 네 재앙 각각에서 오로지 한 명의 생존자만이 남는다. “그가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에 계속해서 오는 빗발치듯한 비보들 앞에 욥은 서있다.

 

땅에 엎드리는 것(그 자체는 애도 의식이 아님; 고디스에 반대)경배하는 것혹은 경의를 표하는 것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 갖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경건의 통일 행위다. 욥은 절망 가운데서가 아니라 경외하는 마음으로 땅에 엎드리는 것이며얼굴을 땅에 대는 것은 틀림없이 말 없는 복종의 행위로서이다. 레인은 이슬람의 종교적 복종 관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천천히 무릎을 꿇고무릎 조금 앞 땅에 손을 놓고, 두 손 사이로 코와 이미를(코를 먼저) 땅에 댄다.”

그 소식에 반응하는 용의 행동들은 많지 않았다: 몸의 상처도, 누더기를 걸침도, 먼지를 뿌림도 애가도 울음도 단식도 없었다. 이는 단지 단순내러티브 스타일의 질서인가, 아니면 격정의 대화로 터져 버릴 과잉 억제의 신호인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 온즉 벗고 나왔은즉 그가 나온 대로 돌아가고

 

우리는 또 한 번 이 구절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멋진 해설을 선두로(Edjfyjng)의 갖가지 배경들에 비추어 그것을 설명해 볼 수 있다. 용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여호와가 주셨는데 스바 사람갈대아 사람번개와 대풍이 가져갔다그는 그의 인간 원수들과 자연의 힘들을 궁극적으로 책임 있는 분에게 종속된 것으로 본다. 그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고 고백한다.

 

  욥은 또한 마치 상실을 당한 많은 희생자들의 경우처럼 말하지 않는다. 뼈아픈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과거의 기쁜 일들에만 배타적으로 안주함으로써 현재의 아픔을 쫓아내려고 하는 것인 양 여호와께서 주셨다고 간단하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선물과 상실, 기쁨과 아픔을 균형 있게 대할 수 있고, 그 둘 다 하나님의 손으로부터온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더 나아가 욥은 단순히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사려 깊은 경건의 발언이다. 그렇다 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들이 말해질 때의 감정을 분명하게 보여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다음 표현이 그렇게 한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여호와는 주신 것으로 혹은 취하신 것으로 찬송 받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욥에게 보이셨던 것 전체로 인해 찬송 받으신다

 

  우리는 조금 덜 중요하지만 욥이 (여기서 유일하게)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

욥은 결코 하나님을 저주함으로 "죄를 범하지않았다. “이 모든 일에라는 말은 이제까지 서술된 모든 상황(호르스트)을 가리킬 수 있고. 혹은 보다 개연적으로 욥이 말한 모든 것(도름)을 가리킬 수 있다. 불행은 용으로 하여금 단순히 완곡 어법적으로 찬송이라 불리는 단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의미에서 찬송하도록했다. 하나님이 하신 것 중 어느 것도 비판에 열려 있지 않다. 욥의 반응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경외의 태도이다.

 

  사람은 어려움 당하면 죄짓기 쉽다. 다름이 아니라 불신의 죄이다. 도대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은 말한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22). 뒤이어 욥 자신의 몸에까지 불행이 밀어닥쳤을 때 욥은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저주 할 것이라고 했다. 욥의 아내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했다. 그러나 욥은 말로 죄를 짓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욥의 저자의 평가이다.

현대의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불행이 거듭 닥쳐서 더 기대할 것이 없을 때 현대인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 있다.

  욥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 존재를 인정하고, 찬양했다. 복이 달아나고 최악의 상황이 처했는데도 그는 화려한 축복 속에서 섬겼던 그 하나님을 그대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탄이 진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복을 받으려고 하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섬긴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노예 출신의 철학자로 이름 높은 에픽테투스는 이런 글을 적었다.

 

삶에서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경우에도 난 이러이러한 것을 잃었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고 말하라.

너의 자식이 죽었는가? 아니다. 그들의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 것이다.

너의 배우자가 죽었는가? 아니다. 그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다.

너이 재산과 소유물을 다 빼앗겼는가? 아니다. 그것들 역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세상이 허락했기 때문에 넌 현재 이러저러한 것들 갖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이 네 곁에 있는 동안 소중히 여겨라.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여인숙의 방을 소중히 여기듯이.

이 그리스 철학자는 그저 세상이 허락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욥기는 저자는 창조주의 주권이라고 말한다.

 

  욥은 자기가 겪는 고통에 초연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존재의 터전이 무너진 것처럼 반응하지는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에 그는 그것을 자기 삶의 한 부분으로만 받아들인다. 여느 사람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운 평정심이다.

  욥은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탄의 패배는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욥의 이 순전한 신앙이 또 다른 불행의 전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도자의 말이 떠오른다.

  (7:16-17) [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욥의 경건이 지나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그의 불행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찬송가 541. 꽃이 피는 봄날에만

꽃이 피는 봄날에만 주의 사랑 있음인가

열매맺는 가을에만 주의 은혜 있음인가

땀을쏟는 여름에도 주의 사랑 여전하며

추운겨울 주릴때도 주의 위로 변함없네

 

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 더 귀하고

솔로몬의 지혜보다 욥의 인내 아름답다

이세상의 부귀영화 마귀유혹 손짓하나

고생중에 인내하면 최후승리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