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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해

딤후 3장 1-9절 말세에 고통하는 때

 

1. 고통의 때에 대한 대처 (1-2)

 

사도는 무슨 이유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진리에 대한 반대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현상이 아니라 계속되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복음의 진리 위에 확고히 선다면 에워싼 위험과 고통들이 곧 제거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때가 바로 말세이다. 우리는 이러한 때가 결코 만만한 때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과거의 방법과 달리 사단은 더 교묘한 술책으로 믿는자들을 넘어뜨리려 한다. 우리는 결코 쉬운 신앙생활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도리어 일제시대나 한국전쟁시기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신앙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 때는 신앙을 고백함으로 순교의 자리에 한번만 서면 신앙인으로서 떳떳했다. 하지만, 이 세대는 우리의 신앙을 참으로 치졸하게 만든다. 더 편한 삶이 풍요한 삶이 있는데 왜 그리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말한다. 하나님도 믿고 세상의 풍요도 누리라고 말한다. 우리의 목숨이 부지 되는 동안 끊임없이 이러한 유혹은 우리를 시험한다.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사랑하는 것 사이의 갈등이다.

 

2. 악인들에 대한 기술 (3-9)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는 사람이 된다. 자신데 대해 과장된 생각을 소유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경멸적으로 깔보고 그들에 대한 나쁜 말을 일삼게 된다.

그들은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한다.

사회생활에서도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는 자들이다.

자기 내부를 위해서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털을 마련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자신의 몸을 공처럼 웅크리고 날카로운 가시들만 내보이는 고슴도치와 같은 인생들이다.

성경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세의 고통하는 때의 사람들은 자기사랑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 이 고통하는 때의 고통의 뿌리는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의 종교적 행위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1:14-17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23:15)고 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예배의 의식에 참여했다. 그들은 찬송가를 불렀으며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헌금함에 헌금을 넣었고, 그들은 아주 경건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이 없는 모양일 뿐이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신다. 이것은 죄인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라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셨다. 그리고 디모데가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빠져나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들을 본받아서는 안될 것이며, 돌아설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불경건과 자기사랑과 악행으로 가득한 사람들이 사람들을 포섭하는 방법은 마치 군사작전처럼 묘사되고 있다.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 유인이라는 단어는 정확히 전쟁에서 포로를 사로잡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전법은 전면적이기 보다 게릴라전이다. 남자들이 일하러 밖으로 나간 동안 약한 어자들에게 방문하여 공략했다. 마치 뱀이 처음에 이브를 속였던 것 처럼 말이다.

이 여자들 또한 죄를 중히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성격과 지성에 있어서 약한 그러한 여자들은 가가호호 방문하며 돌아 다니는 종교 외판원들의 손쉬운 먹이감이 된다.

 

거짓선생들의 본보기로 바울은 얀네얌브레를 언급하고 있다. 옛날에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객들처럼 거짓 선생들은 악한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이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거짓선생들이 술객에 비유된 것 보다 바울이 그것을 통하여 자신을 모세에 비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다고 (34:10,11) 우리가 듣고 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자신을 모세와 동등한 반열에 놓고 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위대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짓선생들이 진리를 대적하여 일어났기 때문이다. 모세를 통해온 하나님의 말씀이 핍박받은 것처럼 바울을 통해 증거된 복음이 또한 고난을 받고 있다.

거짓선생의 가르침은 일시적으로 전파될 수 있고 독한 창질 처럼 전염되어 갈 수 있으나 그것은 더 나가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얀네와 얌브레가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밭에 밀 사이에 뿌려진 가라지처럼 양떼가운데 섞인 염소떼처럼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속에는 부패한 마음과 거짓믿음을 가진 외식하는 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기 보다 자아와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보유하고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약한 자들을 넘어뜨린다.

그러나, 디모데는 이 전염병에 감염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이 범람하는 풍조에 휩쓸려서도 안되며 대항하여 담대하게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어떻게 살것인가?

 

이 세대는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을 연출하고 표현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그리고, 자신의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기 보다 더하는 시대이다. 이러한 풍조는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한다. 이것은 진리의 대적자이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사단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이 네게 편하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진리는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이고, 자신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주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의 걷는 길은 외롭고 협착한 좁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은 영생의 길이다. 청년들이여 또한 우리 청년의 때는 얼마나 많은 유혹에 빠지기 쉬운가? 하지만, 결론을 볼 줄 아는 시력을 가진 사람이 되자. 잠시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바라볼 줄 아는 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