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편말씀 묵상

시편 142편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표제어를 따르면 배경은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할 때(삼상 18-21) 아둘람 동굴에 숨어있던 절박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삼상 22:1).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그때 상황은 절망적이다. 다윗이 사울과 그 부하들에게 에워싸여 동굴속에 홀로 있지만, 그는 곤경가운데 구원을 구하는 슬픈 어조의 기도를 올린다.

인생을 살다보면 동굴로 피해 숨어야 하는 시간이 있다. 동굴 은 격리된 곳, 고독한 곳이다. 동굴은 아무도 없는 곳이다. 버림받은 자의 처소 이다. 다윗은 아마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동굴을 피신했을 때 이곳서 절망을 경험했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다윗은 원통함과 혼자됨을 경험한다.

3절의 시를 보면, 그의 심령은 황폐하다. 그의 내면에서는 감정이 폭발했다. 만물이 그의 머리 위로 무너져내리고 있다. 그는 이 고된 시련의 더미에 눌려 속에서 상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길을 아신다(yadah: 친밀하게 알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인식보다 훨씬 더 깊은 지식이다. 하나님은 그의 길에 다윗과 함께 하며 절친한 관계를 맺으신다. 다윗은 다 포기하고 싶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닻을 내린다. 다윗의 원수들인 사울과 부하들이 짐승처럼 다윗을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다.

 

 

1/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 없나이다

 

[1]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2] 내가 내 원통함을 그의 앞에 토로하며 내 우환을 그의 앞에 진술하는도다

[3]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내가 가는 길에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4] 오른쪽을 살펴 보소서 나를 아는 이도 없고 나의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보는 이도 없나이다

 

2/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5]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오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그들은 나보다 강하니이다

[7]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 르리이다

 

그러나, 한 순간 그는 이 동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한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동굴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지성소이다. 그는 갑자기 이 동굴에 가득한 그분의 임재를 확인하며 엎드린다. 소리내어 여호와께 호소한다. 당신만은 내 억울함을 아시지 않느냐고 호소한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그의 안식이 된 것이다.

그 순간 동굴은 그의 새로운 피난처로 변신한다. 우리가 버림받은 곳이 바로 우리의 안식처가 된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다. 기도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기도를 잊지 않는 한 절망은 없다. 절망의 동굴은 희망의 진원지가 된다.

동굴에서 다윗은 2가지를 기도한다. 하나는 다시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고난은 우리에게 감사를 잊게 할 수가 있다. 인생의 회복은 감사의 회복과 함께 시작된다. 또 하나는 이제 함께 일할 의인을 보내 달라고 기도한다. 인생의 새 미래를 위한 동역자가 필요하다. .

첫째 이 시인은 절망적인 그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함을 잊지 않았다. 그가 사용한 기도의 용어를 보면 부르짖는다”,“소리내어 간구한다”,“그 앞에 원통함을 토한다”,“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한다둥의 말들인데하나님께 매어달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죽더라도 하나님의 손에 죽지, 저희 원수들의 손에서는 죽지 않겠다는 각오로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태도이다.

둘째로 주께서 내 길을 아신다고 했다. 우리 인간의 운명을 아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시다. 우리가 비록 길을 걸어간대도 우리는 한 치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우리는 밤중에 내 생명이 끊어질지 우리의 길을 우리 스스로 보장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신다. 우리 길을 아신다. 멀리서도 우리 생각을 아시고우리의 앉고 섬을 아신다고 했다139. 내가 내 길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인간 자신의 교만이 있는 동안우리는 저희의 강함 앞에 굴복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길을 아신다함은 저희에게 굴복당함보다는 하나님께 굴복당함을 말한다. 이 하나님께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맡길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 이시라16:9고 하셨다.

오경웅은 이렇게 시인의 말을 우리에게 전한다.

제 영혼이 아뜩한 날 주님은 저의 행로 아시옵니다. 주님 저의 길이 얼마나 험한지요? 촘촘한 그물들 투성이입니다.”(3)

마음속에 뭘 어찌 해야 할지 정해지는 바가 있으니 내 마음을 굳게 지켜내리니 이 어려운 때를 지나면 끝내 밝은 날이 올 것 이라는 소망이다. 마음에 이미 한없이 푸른 하늘가 모든 것을 품어주는 땅이 있으니 잠깐의 풍우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굳건히 자신을 지켜가겠다는 것이다. 오경웅은 마음의 성도(聖道) 즉 주님을 따르는 길과 믿음으로 바꾸었다. 주님안에 생명과 진리가 있다.

. 다른 사람이 나를 도와 줄 수도 없고 도우려 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기꺼이 돕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기회가 된다면 탄식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버렸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며 구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첫 단계가 되는 한,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버림받은 고통 다른 사람들의 부주의한 무관심 대문에 마치 영혼이 추방당하는 듯한 아픔 을 고백하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공동체의 중심부에 참여하게 된다. 바로 그 때 의인이 우리를 두를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서 오가는 따뜻한 영접의 말과 격려의 몸짓을 통해, 우리를 용납하시며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가 아주 많다.

이 시인이 말하는 저희는 나보다 강하나이다라는 말은 이 시인만이 아니라, 이 불의와 악이 지배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 생각된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아합과 이세벨의 박해가 너무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오직 나만 남았나이다. 저희가 내 생명올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 1910). 이 말은 곧 저희가 나보다 강하나이다함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 편에 서시고 그를 도와 이세벨의 핍박에서도 살아나게 하셨다.

그의 우편을 살펴보나 아는 자 없고 피난처도 없고 돌보는 자도 없었다”(142:4 )고 한 시인과 같은 사정에서 건져주셨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의 구원을 믿는 사람에게는 저희가 나보다 강하다’’는 말이 변하여 내가 오히려 저희보다 강하게 될 수 있읍니다로 바뀌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절망적 시간에는 절박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 하나님 외에 아무도 도울 자 없을 때 우리는 철저히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던진다. 우리가 그분의 평강을 얻는 것응 기도로 우리 시련을 하나님께 내어 맡길 때이다.

 

 

기도

성령님, 깨어진 약속 때문에 상심하고 믿음 없는 친구들에게 실망해서 생긴 제 인생의 빈자리에 친구요 위로자로 임하소서. 고통스러운 문제에 직면한 때가 곧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도움의 때가 되게 해 주소서.저 혼자 소외되어 외로워할 때 제 곁에 함께 하소서. 죄로 나아갈 수도 있는 제 외로움을, 믿음을 창조하는 공동체로 들어가는 준비 단계로 사용하여 주소서.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동일한 헌신을 다짐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로 저를 인도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