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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 141편 / 황혼녘의 기도

 

다윗은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카라, ‘울부짖다, 큰 소리로 부르다. 포효하다’)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 지체하지 마소서, 한시도 머뭇거릴 수 없나이다.”하는 것이다.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주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에 비유한다. 분향함은 주님께 매일 드려졌다. 이것은 보통 번제와 함께 드렸고, 종종 저녁 제사와 관련이 있었다.

(29:38-42) [38]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40] 한 어린 양에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사분의 일 힌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더할지며 [41]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신앙의 선배들 밝아오는 새벽 바라보며 시 63편을 읽고 기도했다. 그리고 황혼이 짙어갈 때 시편 141편으로 기도했다. 우리의 분주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황혼의 평화가 임할 것이다. 황혼녘의 기도. 우리 미움은 용서로 녹아지고 우리 고통은 은혜로 치유될 것이다.

하루 온종일 힘든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 마음은 무의식 중에서 상처를 입는다. 분심을 가라앉히고 기도하는 내 마음의 수면에 문득 문득 떠오르는 분노는 내가 얼마나 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지난 하루의 그 답답했던 시간들 속에 내 입술로 분출된 조급했고 더렵혀진 언어의 부끄러운 방황들을 되돌아 보라.

이제는 입을 다물고 입을 열 시간이다. 언어만이 기도가 아니다. 우리는 언어를 넘어서는 기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 기도의 언어가 강둑이라면 기도 그 자체는 강물이라고 말한 이가 있다. 기도의 언어는 기도의 방향을 이끌어 준다. 그러나 강둑의 경계가 정해졌다면 이제 조용히 흘러가야 한다. 저녁 기도는 흐르는 강물이다. 입술에 담겨진 피곤한 언어의 휴희 대신 이제 어둠 속에 임하는 안식의 은혜를 갈망하자.

 

 

악기의 음이 맞지 않는다. 열과 성을 다하여 연주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맞지 않는 음정을 열정을 다한다고 상쇄되지 않는다. 연주하기 전에 먼저 악기를 조욜해야 한다. 하늘은 우리가 조율되기를 원한다. 일단 마음을 조율하고 벼려야 한다. 기도의 시간은 바로 하나님의 주파수에 우리의 마음을 맞추는 시간, 우리 내면의 소리를 주님의 뜻에 조율하는 시간이다. _ 마틴 슐레스케, 바이올린과 순례자, 유영미 옮김, 니케북스, 2020, 20

 

141편은 악인들과 그들의 악한 길에서 건져주심을 구하는 다윗의 기도를 담고 있다. 이 시편은 우리에게 기도의 방법을 가르치는 시편이다. 이것은 열정적인 간구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고 있는 개인적인 탄식시다.

 

이 시인은 기도의 사람이다. “내가 항상 기도하리이다5에서 자기의 고난의 삶과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 5절의 항상내 생명이 있는 동안으로 읽을 수도 있다.

 

[5]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그러나 여기 그들의 재난이란 말은 누구의 재난인가? 그 앞에 나온 의인인가? 물론 의인이 불행한 일을 당할 때 그를 위하여 내가 항상 기도한다’’는 말도 되지만전체의 문맥으로 보아서 의인의 재난으로 읽기보다 악인이 만드는 재난 또는 악행과는 달리 나는 항상 기도 하리이다로 읽음이 의미가 통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악인은 시편 여러 곳에서 의인을 대항하고 모함하고 그가 수치당하고 망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9_10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악인은 이렇게 의인에게 악행을 한다고 해도 시인 자신은 악인과는 다르게 의인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겠다는 말이다. 공동번역에는 5절 하반절을 나의 머리 위에 악인들이 기름을 바르게 하지 마소서라 하여 5절 상반절에 나온 의인과 하는 일과 대조시키고 있다

 

이 시인의 기도가 또 한 가지 가르쳐 주는 교훈은 그의 기도가 참회의 기도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시편의 기도는 어려움에서 구출되기를 원하고 병에서 고침을 받고 위기에 건짐받고, 원수의 모략과 함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둥, 구원과 도움을 간청하는 기도이다. 그러나 이런 간구를 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약점과 죄를 고백하는 참회의 기도를 드림도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141편도 참회의 시라 할 수 있다. 이 시인의 참회는 자기 혀에 대한 관심이다. 혀로써 실수한 자신의 죄를 특히 기억하고 다시는 그러한 말의 실수를 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야웨,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3.

이렇게 말의 실수를 언급함에 있어서 이 시인은 이스라엘의 지혜문학의 지식을 가진 사람 같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온다3:3.

내가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라……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39 : 1. 입에 파수꾼을 세우고 문을 지키둣이 입술을 지킨다는 표현은 아주 구체적인 상징이다. 이 시인은 자기

말을 철저히 삼갈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고 있다. 이것은 자기 속에 있는 악의 경향성에 대하여 경계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악에 기울어서 죄를 지을까 조심하고 있다. 악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다.

 

믿음의 여정 또한 저 혼자 자기를 잘 지켜내는 길이 아니다. 더불어 서로 일깨우며 바른 길을 함께 격려하며 걷는 공동체와 믿음의 벗들이 무엇 보다 소중하다. 그 길에서 늘 우리 주께서 가장 좋은 벗이 되심을 몸소 겪는 것! 이보다 좋을 일이 어디 있을까?

혹여 두려운 것은 오늘날 교회가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를 칭찬하며 자화자찬(自畵自讚)에 빠질까 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세상의 소금 역할을 못하면서도 스스로 의롭다 여길까 하는 것이다. 기도를 쉬지 않으면서 책망에 깨어있고 입술과 마음을 지키는 선한 이웃이 내게 있는가? 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