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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3장 10-18절/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 주약교회 김광영목사

  “Amazing Grace" (나같은 죄인 살리신) 이 찬송의 작시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그는 뉴턴이라는 사람인데 젊은 시절 영국과 아프리카를 오가는 노예선의 선장이었다. 그런데 그 곳을 오가는 어느날, 큰 폭풍을 만나게 되고,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살려주신 것을 안 후 노예무역을 그만 두었다. 그리고 복음전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39살 올레이라는 마을에서 목회를 하였다. 15년 동안 이 교회에서 많은 열매들을 보았다. 회심한 선장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 런던에가서 보다 큰 사역을 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의 시간이 가까웠을 때, 뉴턴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의 기억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큰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는 큰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율법의 행위에 속한자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일을 항상 행하지 않는자는 저주아래있다. 왜냐하면 율법은 지키지 못하는 자에게 저주를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율법에는 전혀 그릇됨이 없다. 문제는 죄인 자신에게 있다. 율법을 거룩하다. 그러므로 거룩하지 못한 죄인들은 지킬 수 없다. 율법은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결코 사람의 죄를 없이 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라.

 

만일 거울이 없다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고서야 자기 얼굴에 더러운 것이 묻어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본다고 해서 자신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율법의 사명은 인간의 참 모습을 보여주며 씻어야 할 필요성을 알려줄 뿐이지 그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문질러 보라. 오히려 더러운 것이 얼굴 전면에 퍼지고 말 것이다.

이젠 거울에서 얼굴을 돌려 물과 비누로 씻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서야 한다. 말씀의 물로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예수안에 있는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나무에 달린자 마다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했는데, 그가 나무에 달리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다.

율법이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리스도를 믿는자에게는 마치 율법을 완전히 지켜 의를 얻는 거처럼 여겨 주어서 그에게 율법이 끝이 났다는 말이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고 자유하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외우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계명은 나에게 정죄와 심판만 말해 주었을 뿐 내 마음을 변화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느날 나는 <갈보리>동산의 하나님의 은혜에 직면하게 되었다. 십자가 상의 주님을 바라보았을 때 율법의 위협과 대결해 왔던 돌같이 굳어진 나의 마음이 스스로 녹아지고 말았다.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인임을 자백하라. 그리고 십자가의 저주를 지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그리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 하나님의 자유와 평안이 넘칠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그것을 무효로 하거나 거기에 무엇을 덧붙일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의 씨로 100세에 분명히 이삭을 주셨고, 또한 이것이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만백성을 구원하는 씨가 되게 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미 맺으신 언약을 사백삼십년 뒤에 생긴 율법이 이를 무효로 하여 그약속을 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유업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거저 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행위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내가 뭔가를 하나님앞에서 잘해야 인정받는 것 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음식은 먹으면 안되고, 어떤 날은 지켜야 되고, ............... 그러나, 이러한 행위를 통한 구원에 대한 것을 율법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택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일방적인 은혜를 그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왜 주어졌나요? 본문은 약속하신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 죄를 밝히려고 준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것이 죄 아래 갇혀있다고 말합니다. 감옥게 갇힌 죄수처럼 모든 사람이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이 그 간수장입니다. 우리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고 행하는 것을 책하며 우리로 하여금 부자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태양아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는 것 처럼 우리의 모든 죄를 율법은 낱낱이 드러나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앞에서 우리영혼의 온갖 지저분한 것들과 악한 것들과 구역질 나는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풍선을 하나 가져다가 속에 바람을 집어 넣고 그 위에 구약율법을 펜으로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명령들 중 하나를 핀으로 찔러 보십시오, 아마 펑 하고 다 터져 버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중 하나만 어겨도 전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만 잘못을 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다면 하루에 1번의 미움, 1번의 나쁜 생각을 한다해도 1년이면 365! 최소한 10년을 살아도 3650번인데 어떻게 하나님앞에서 내가 착하게 살아서 나를 천국보내 주십시오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율법을 주어 우리의 죄인됨을 보게 하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죄 가운데 죽어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공로가 나에게 있지않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임을 알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우리영혼의 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