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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1장 11-24절

 

긴 겨울이가면 새 봄이 돌아옵니다. 겨우내 잠잠하던 새들이 날며 지저귀고 포근하게 대지를 감싸는 햇살아래 얼었던 냇물은 녹아 흐르며 즐거운 춤을 춥니다. 따스한 바람이 마른 나무가지들을 스치면 새순이 잠에서 깨어난 아이처럼 눈 부비며 일어나 연두빛 싹을 틔웁니다. 이 봄날에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겨울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은 어떻까요? 온통 눈과 얼음이 뒤덮혀 있고, 꽁꽁어는 듯한 추위에 살아가고 있는 있는 사람들, 봄이라고는 구경도 못해본 사람이 있다면 어떻까요? 따뜻한 햇살과 봄바람속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까요?

우리는 겨울을 지나 봄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버린 땅의 고독함과 적막함과 쓸쓸함과 차디찬 찬 바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경험케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앞에 나아올 때 우리의 모든 죄는 햇빛에 눈 녹듯 녹아버리고, 우리의 굳어지고 두려워하며 딱딱해진 땅과 같은 마음에서 평안과 사랑의 씨앗들이 움트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전에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이제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를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감격에 차 있고, 그로 인해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할 때 그는 자신이 가진 생각대로 열심히만 살면 그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 분의 종이되어 살아가고 있는 바울의 고백을 통해 우리를 부르신 이가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며 무엇을 증거하며 살아야 할지를 알기를 원합니다.

 

 

사도바울이 만난 예수그리스도

 

그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내가 알게하고 싶은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어떤 사람한테 배우거나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확증하며 말합니다.

 

그가 만난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였을까요?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기독교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소개할 수 있습니까?

바울선생은 내 어머니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를 기억합니까? 아마 대부분 4-5살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있어도 태어나던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태어나기도 전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보시고 나를 택정하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도 우리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기질과 성격을 가지며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머리끝부터 밑바닥까지 알지 못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전에 나를 보시며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시는 분이 바로 그 분이십니다.

 

시편의 기자는 고백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을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우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기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39:13-16)

 

우리의 귀를 만드신 그 분은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우리의 눈을 만드신 그 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94:9)

그 하나님이 나를 불러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은 누구 입니까? 바로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억지로 우기다가 유대인에게 잡혀죽은 한 사형수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하는 스데반집사님도 돌팔매질 해서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잘라 심지어 다른나라의 도시 다메섹까지 원정가서 그 곳의 그리스도인들의 씨를 말리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사건이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다메섹성에 가까이 갔을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저를 비추었습니다. 너무도 당황스럽고 무서워 땅에 엎드러져 버렸습니다. 그 때에 그에게 들려오는 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9)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 나사렛 이단의 괴수, 그 분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자신의 삶에 큰 전환점을 맞게된 것입니다. 그의 예수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 져 버렸습니다.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를 이제 자신의 목숨을 다하여 증거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병을 낳게하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 혹은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치며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던 세례요한과 같은 자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세계4대성자중의 하나라고 말합니까? 그들의 말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다시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여러분은 예수를 누구라 합니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칭찬하시며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시며 그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 비록 자신이 생전에 그 분의 제자로 따라다닌 적도 없지만, 다메섹가는 길에서 만난 그 분이 바로 베드로사도가 3년동안 따라다니며 체험한 바로 그 분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

 

우리는 우리가 이 곳에 있는 것이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지난날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예배의 자리에 있기까지 그냥 내 발걸음으로 온 것일까요? 주님을 만난 나름대로의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되어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 때문이었다고 명확히 고백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우리를 친구들에게 말씀하게 하시고 그들을 부르시는 이가 우리 예수님,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해 친히 자신의 몸을 드리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사님이 여러분을 귀찮게 하고 선생님들이 여러분에게 요구해서 친구들에게 예수를 전한다고 생각하는 분 있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지를 나눠줄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부르신 이가 바로 예수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가 나를 믿지 않는 학교에 보내셔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담대히 그 복음을 증거하십시오. 그 분이 내속에 역사하심을 느끼십니까?

그 분이 나의 마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것은 마치 교장선생님의 말을 친구에게 전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인기스타의 말을 친구에게 전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이 너를 정말 좋아하시고 너를 초대하신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울의 삶을 겨울에서 봄으로 바꿔 놓으셨듯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 가운데 삭개오처럼 겉으로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한없는 괴로움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사랑의 음성을 들려주시며 봄과 같은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나를 부르시고 사랑하신 주님의 그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그들에게 찾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