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미엔신부
1873년 5월 10일, 벨기에 출신의 신부 한 사람이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걸어 들어간다. 매주 열 두 명씩 죽어 나가는 그곳에서 서른 세 살의 다미엔 신부는 그때부터 묵묵히 나환자들을 위한 집을 짓고 손수 관을 짰다. 그는 700여 명이 넘는 나환자들의 집을 지어주고, 의사의 도움 없이 나환자들의 고름을 짜주고 환부를 씻어주며 붕대를 갈아주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빛을 밝혀주었다. 그리고 매일 죽어가는 이들을 위하여 관을 만들고 무덤을 파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이렇게 어려움 속에서 나환자들을 위해 희생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자 냉담하던 환자들도 신뢰와 존경심을 가지고 따르게 되었다. 1881년에는 하와이 정부로부터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한 공로로 ‘카라카우아’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 병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병자들은 그의 뒤통수에 대고 비웃으며 말했다. “자신은 건강한 몸이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살지만, 만약 우리들처럼 날마다 몸이 썩어간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처음부터 굳게 닫혀져 버린 것이다. 다미엔은 고민에 싸여 제단 앞에 나아가 비장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님이시여, 저를 문둥이로 만들어 주세요.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죄인 같이 되셨던 예수님처럼 문둥이를 구하기 위해 저도 문둥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기도를 드린 지 얼마 후에, 선교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한 사제를 만나게 되었다. 대화 중에 타고 있던 촛대에 잘못 손을 얹고 있던 다미엔 신부는 손이 타는데도 모르고 있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제가 “다미엔 드디어 자네도 문둥이가 되었구먼.”이라고 했다. 그러자 다미엔 신부는 무릎을 꿇고, “주님, 감사합니다. 저도 이제야 문둥병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자격도, 능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얼마 후 다미엔은 감각이 점차로 무디어가고 눈썹이 빠지고 관절이 떨어져 나갔다. 죽음의 병이 찾아온 것이다.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 나간 문둥병자의 모습으로 그들 앞에 선 다미엔은 외쳤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문둥병에 걸린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다미엔 신부가 문둥병에 걸린 채 자신들에게 이같은 복음을 외쳤을 때, 수많은 문둥병자들은 전류에 감전된 듯한 감동을 받았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후 단 3년만에 그 죽음의 섬에서 800명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대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태석 신부
그는 부산의 ‘세발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힘든’ 비탈진 산동네에서 자랐다. 10남매 중 9번째. 동네 성당이 유일한 놀이터였다. 아홉 살 때 부친은 작고했고, 모친이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 해가며 자식들을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성당에서 다미안 신부(1840~1889)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들 태석이 공부를 잘해 인제의대에 진학했을 때 모친은 “대통령 된 것보다 더 기뻤다.” 그러나 의대 졸업 후 그는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광주가톨릭대에 진학한다. 이미 형(신부)과 누나(수녀)를 하느님에게 바친 모친이 눈물로 말렸지만, 이태석 역시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리고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서 아프리카 수단으로 떠난다. 남부 수단 톤즈 마을의 유일한 의사. 하루 300여 명의 환자가 몰렸고, 100㎞ 떨어진 곳에서 며칠씩 걸어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이슬람권 환자들도 반겼다.
“가난과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죽음의 늪에서 뛰쳐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톨릭이니 개신교니 이슬람교니 하며 사람을 종교로 구분 짓는 것이 그들에겐 배부른 소리요 조금은 미안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이 신부는 손수 벽돌을 찍어 병원 건물을 세웠다. 학교를 지어 초·중·고교 과정을 개설했다. 그가 조직한 35인조 브라스밴드는 수단의 명물이 되었다. 톤즈 근처의 한센인 집단 거주지는 이 신부가 애착을 갖고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거리낌 없이 한센인들과 어울리는 영화 속 이 신부는 130년 전 하와이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동고동락하던 다미안 신부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2008년 11월 휴가차 입국한 그는 지인의 권유로 난생처음 건강검진을 받고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암 선고 1주일 후 밝은 표정으로 수단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음악회에 나와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른다.
‘너의 마음 나를 주고 나의 그것 너 받으리. 우리의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우물을 파다 왔는데”라며 톤즈 마을만 생각하던 그는 끝내 아프리카행 비행기를 다시 타지 못하고 2010년 1월 14일 오전 5시35분 하느님 곁으로 떠났다. 다미안 신부보다 한 해 이른 4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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