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슈사쿠의 소설「침묵」. 그 소설의 배경은 17세기 에도 막부시대의 일본입니다. 주인공로드리고 신부는 박해를 받
아죽어 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라고 절규한다. 일본 관리들은 로드리고에게 일본인 성도들을 살려 주겠다는 조건으로 예수님의 성화<월®)를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한다. 그는 신앙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일본인 성도들을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평생 지켜 온 신앙을포기해야할지 고민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드리고는 진정한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너는 내가 성도들을 외면한다고 생각하지만,나는 그들과함께 고통 받고 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밟히기 위해서 세상에 왔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는 성화{聖肅)를 밟고 배교하지만,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1/ 거짓선지자 거짓선생의 모습(10-19절)
천사도 감히 송사하지 못하는데 거짓교사들이 그리스도를 훼방한다. 이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없는 짐승같다. 불의의 값, 낮의 연락에 쩔어 있음. 음심이 가득한 눈, 굳세지 못한 유혹,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 베드로는 의분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은 이성 없는 짐승으로 전락하고, 짐승보다 못한 자로 전락한다.
그들은 물 없는 샘처럼 속이다.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처럼 유익은 커녕 재앙이다. 육체의 정욕은 죄를 짓는 것이지 자유가 아니다.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유대인들은 발람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전설적인 이교도 마법사로 이해했다. 필로는 발람을 ‘예언자로서 많은나라에 국가적인중요한사건인,큰 비,범람혹은 가뭄과 기근,질병을 예언했던 사람 으로 평가한다.
요세푸스는 그를 당대 최고의 선지자’ 로 부른다. 헬레니즘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를 에돔 왕 브올의 아들 벨라로 생각했고,엘리후와 더불어 욥의 친구라고 믿었다. 발람이 거주했던 곳은 밧단아람인데 꿈의 해석자라는그의 명성 때문에 그 도시는 페롤(해석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헬레니즘 시대의〈나귀와 발람〉렘브란트, 1626 것으로 보이는 어떤 자료에는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의 급속한 번성에 두려움을 느낀 바로의 세 조언자 중 한 사람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신약에서 발람의 이름은 탐욕의 상징이며 이교 의식과 부도덕의 상징이었다('생명의삶 플러스' 중에서)
① 거짓 교사들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자들로,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다. 그러므로 이들은 종국에 파열을 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② 거짓 교사들이 복음의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 동기는 탐심이었다. 탐심은 거짓 교사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미친 행동’을 일삼는 이성 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한다.
2/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경고(20-22절)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리스도를 앎으로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한다. 개가 그 토하였던 곳에 돌아감과 같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과 같다. 이단들이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성도들은 놀고 있고 도리어 미혹되고 있다. 거짓교사 많음에 개탄할 것이 아니라 참교사가 적음을 한탄해야 한다. 교회서 하는 일이 자기 통장에서 돈 빼서 다른 통장에 넣는 것처럼 수평이동만 되고 있다. 복음전도가 필요하다. 새로운 신자의 세례와 회심이 필요하다. 신구약 66권에 정통하자. 거짓교사와의 싸움을 위해 성경을 철저히 읽고 또 분별해야 한다. 피안적 구원과 함께 이땅에 임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책임과 갈망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이땅을 노다마드로 살아가기 위한 천국에 대한 소망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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