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편말씀 묵상

시편 120편/ 환난 중에 부르짖었더니

 

 

우리는 우리의 전심을 하나님의 집으로 가져가 낭독되는 유언장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처럼 예배해야 한다.”

_ J.C 라일(Ryle)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120:2,7)

 

1/ 시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1-2)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2/ 시인의 간구와 하나님의 응답(3-4)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3/ 화평에 대한 소망(5-7)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순례자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이 시편에서 134편까지 열다섯 편이 순례자의 노래또는 성전에 올라가는 이의 노래라 불린다.

이 노래들이 올라가는 노래로 명명된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지형적으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2,700피트 높이의 시온산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이 순례객들은 북쪽으로 메섹과 남쪽으로는 게달처럼 먼 곳에서 거룩한 성으로 여행을 했다. 이 예배자들은 고향에서 불신자들의 비난 속에 살았다. 그들은 큰 기대를 갖고 하나님의 집의 이 정기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위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여행했다.

 

 

순례자의 시작은 자발적인 떠남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떠남이기도 하다. 거룩한 곳을 향한 열망이 있기에 자발적인 것이라면 도무지 한순간도 머물 수 없는 현실에 대한 깊은 자각이기에 어쩔 수 없는 떠남이기도 하다. 역설적 언어로 자발적 추방이라고 할까?

시인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기억은 아스라한 과거에 머물고 있다. 현실은 하나님 없이 제 주장들로 넘쳐나고 인간을 악으로 넘어뜨리려는 거짓이 판치는 세상이다. 그러한 인생들이 맞을 결과가 시인의 눈에는 선연히 보인다. 자기가 쏜 화살 제게로 돌아오고 그 머리 바로 위에 뜨거운 숯불 놓여있음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지금은 저들의 죄가 보이고 저들의 핍박이 내게 향하지만 언젠가 그마저 보이지 않고 저들과 한마음 되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너무 오래 있었구나! 외로워하면서도 너무 오래 머물렀구나! 이 간격이 보이는 그 순간이 은총의 때요 순례의 시작이다.

오경웅의 번역처럼 이심동처(異心同處), 도무지 한마음을 품을 수 없는 주어진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 곧 떠날 수밖에 없는 길이 된다. 이심(異心)은 다른 마음이기도 하지만 반역의 마음으로도 의미를 짚을 수 있다.

 

1/말씀을 열며

 

가장 외로운 사람이 가장 친절하고, 가장 슬픈 사람이 가장 밝게 웃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영화 소원의 엔딩 크레딧이다. 평화는 너무 작아 지나쳐온 작은 친절에서, 밝은 미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2/ 본문의 말씀

 

거짓말을 즐겨하며 싸움을 일삼는 자들은 결국 화살과 숯불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겉으로 평화를 말해도 실상은 평화를 원치 않는 자들이다. 주님의 그 견고한 그들의 만의 세상 그 견고한 카르텔에 깊은 균열을 낼 것이다.

 

전적으로 세상을 부패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다.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이 결코 인간에게 선한 구석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죄로 말미암은 타락을 경험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형상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선을 행하고 의를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의 모든 존재 영역을 침범하였다.

죄는 인격의 영역을 광범위하게 침투하였다. 그 결과로 우리의 인지 영역이 심하게 왜곡되었다. 우리는 지식의 이름으로 그릇된 이데올로기조차 사상으로 용납하였다 .우리의 정서는 미움과 폭력조차 인간다움으로 미화하기 이르렀다.

시편기자는 무엇보다 두 가지 영역에서 부패한 인간과 부패한 세상을 고발한다. 그 하나가 거짓과 진실의 문제이다. 인간은 모름지기 진실을 추구해야 마땅하다. 우리 모두 진실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우리의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가 이를 증언한다. 우리는 실상 진실을 미워하고 거짓을 사랑한다.

인간의 전적부패의 또 하나의 영역은 전쟁과 평화의 문제이다. 우리는 누구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한다.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싸우는 이유는 단순한다. 타락한 인간의 품성안에는 호전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 마음은 전쟁을 소원하고 있다.

 

시인의 고난은 원수들의 거짓된 입술과 궤사한 혀로 말미암는다고 했다(2). 권력이 횡포하는 시대에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보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출세가 빠르고 사악하게 수단을 부리고 아첨하는 입술을 가진 사람이 권좌에 직결되어 세도와 영화를 누리게 된다. 그것은 모든 권력이 거짓과 속임수 없이는 그 자신의 지반을 굳힐 수도 그 권좌를 오래 계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시인의 고통은 바로 허위, 사기, 아첨, 모략, 중상과 같은 혀의 재간을 부리는 사람 때문에 당하는 고통인 것같다. 그 고통한 단순한 육체적 고통에 머물지 않고 그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상태임을 2절이 알려준다.

메세게달이 언급되는 메섹은 흑해 근처 아나톨리아 동편에 있는 곳으로 야벳의 아들로서 야만족이 사는 곳이다. ‘게달은 이스라엘의 둘째 아들로서 수리아-아라비아지역에 살고 있었던 아랍 족속의 선조중 한사람이다. 이 두 지명은 이곳에서 지역명보다 상징적 의미로 읽어야 한다. 시인은 이방 사라들 사아에 거하면서 예루살렘 축제에 참가하려고 한 일 때문에 그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의 사람들이 이 시인을 몹시 괴롭힌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시의 중요성은 마지막절에 있다. 시인은 평화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지만, 적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대립하고 싸움을 걸어온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95편에도 나오다. “나는 사랑하나, 저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한다... 저희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는다”(95:45), 주님은 말씀하셨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9)

 

 

결론

 

모든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것이다(딤후 3:12). 이것은 신앙생활의 냉혹한 현실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그리스도인의 빛과 어두움 영적 전쟁에 자신이 휘말려 있음을 보게된다. 세상의 반대가 거셀수록 우리는 서로 사랑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세상이 내뿜는 증오의 열기 아래 하나님의 집에서 선포되는 성경의 진리는 상처입은 신자의 영혼에 그만큼 더 소중하게 보일 것이다. 우리도 시인처럼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