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시 95:1)
● 찬송 : 183장 빈 들에 마른 풀같이
● 말씀 : 베드로전서 3장 15~16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 설교 : 맡은 자
● 찬송 : 455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목회서신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우리교회는 비대면(언택트)시대에 ‘온라인 영상예배(온택트)’와 ‘가정 예배’로 코로나 종식을 당기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1월 24일 주일예배는 각 가정에서 예배드립니다. 인도자와 기도순서를 맡을 가족을 미리 정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일설교 영상은 녹화하여 유튜브 링크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이 함께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차후 예배일정은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설교말씀
제목: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
Ⅰ. 마음 문을 열며
‘고난’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고통’처럼 회피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당하는 자들이 많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어 그에 대한 보복을 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것만 챙기다가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는 복이 있는 자’ 라고 강력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과연 우리같이 연약하고 자기 한 몸도 감당하기 힘든 자들이 선을 행함으로 고난당할 수 있을까?
베드로는 과연 어떤 심정으로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도전하는 것일까? 그 또한, 고난당할 때에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친 전력을 가진 자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에 있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Ⅱ. 본문과 씨름하며
1. 모범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 하신 것이다. 죄인된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는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되셨다. 노아홍수는 세상을 심판하실 미래의 심판의 예고편으로 유대인들은 이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몇 명(여덟 명)’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베드로가 핍박받는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기억나게 한 것은 핍박받는 소수의 무리로 존재했던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구원의 길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다. 우리의 가는 이 길에 비록 많은 사람이 함께하지 않고 우리를 비웃고 비방한다 해도 이 믿음에 길에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우리는 믿고 있는가?
노아는 큰 홍수에 방주에서 이 ‘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과거에 심판에 이 물은 방주 속의 노아가족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며 사고팔며 살았던 사람들과를 갈라 놓는 기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장차 올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는 표는 바로 물로 뿌려진 세례가 될 것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임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의인이지만, 십자가의 고통을 걸머쥐신 것을 베드로는 왜 생각나게 하는가? 우리 육체의 남은 때를 예수님처럼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고, 육체의 고난을 받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장악하려는 죄의 세력을 그치셨기에 이제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라는 것이다. 우리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나 남았나? 이제 진정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그 뜻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방법이 도대체 어떤 길일까?
그것은 좁은 길이다. 우리의 옛 습관과 육체에 속한 친구들은 우리가 저희와 함께 방탕에 달음질 하지 않는 것을 보며 “왜 그래? 옛날처럼 그렇게 살지”라고 이상히 여기며 비방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삶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의 일을 직고하게 될 것이다.
2.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
베드로는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라고 말한다. 히브리서기자는 이와 비슷한 말로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라고 말한다. 우리는 과연 선을 행하는데 이러한 담대함과 자신감으로 행하고 있는가? 억지로 함이나 인색함으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의 태도는 어떠한가? 복 있는 자임을 알고 두려워함으로가 아니라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우리 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을 예비하고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며,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뜻일 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당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이 있는가? 그것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모습이 저희 눈에 이상히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사는 사람인가? 세상의 눈에 이상히 여겨지는 사람인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괴짜가 될 수 있겠는가? 철학자 니체는 말했다. “악마와 싸우다보면 악마가 된다.” 우리는 악과 싸우되 악으로 싸우는 자가 아니라 선으로 싸워야한다. 성경대로 산다면, 사람들은 우리 속에 어떤 소망이 있기에 저런 행동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물으러 올 것이다.
Ⅲ. 정곡을 콱 찌르며
우리는 육신의 남은 때를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의인으로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의 인생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해도, 노아의 가족들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천국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소망을 묻는 자들이 많이 생겨나기를 원한다. “주는 나를 돕는 자심을 믿고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나를 해하리요.”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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