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 :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 말씀 : 빌립보서 3장 13~14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설교 : 맡은 자
● 찬송 :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샬롬! 주약교회 가족 여러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코로나시기에, 우리교회는 비대면(언택트)시대에 온라인영상예배(온택트)와
가정예배로 코로나의 종식을 당기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올해 첫 주일(1월3일)은 각 가정에서 예배서식을 가지고, 찬송하고 말씀 나누고 기도합니다. 주일예배는 유튜브 영상설교를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신 후 개인적으로라도 시청하도록 바랍니다.
2021년 01월 01일
김광영목사
제목: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노라
Ⅰ. 마음 문을 열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이전의 자랑들을 어떻게 하는가?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그것이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세속적인 가치관들과 갈등하고 부단히 그것과 싸우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로켓기술자들은 추진로켓을 좀 더 크게 만들고 싶었지만 4피트 8.5인치를 벗어날 수 없었다. 2000년 전 유럽을 정복한 로마군은 로마전차 폭에 맞춰 유럽 전국에 도로를 건설한다. 말 두 마리가 끄는 로마전차, 그 이후 유럽의 표준도로는 말 두 마리의 엉덩이 폭에 맞춰 약 4피트 9인치로 설계되었다.
우리가 익숙해진 관습을 벗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성령이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
Ⅱ. 본문과 씨름하며
1. 삼가는 것(4~9절)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당시의 유대주의자들이 자신의 육체적 할례와 종교적 열심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자신도 그러하다고 말한다(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 한다. 바울은 자신을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다.
바울이 이것을 열거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육신적인 자랑 이것이 다 해로운 것이라는 것이다(7절). 그러나, 무엇이든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고 한다. 저울에 놓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의가 이전의 모든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것임을, 아닌 이전의 것은 도리어 배설물로 여긴다.
기독교변증가인 C.S. 루이스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말한다. “지옥을 붙들고 있는 한 천국은 볼 수 없다. 천국을 받아들이려면 지옥이 남긴 아주 작고 소중한 기념품까지 미련 없이 내버려야 한다.” 우리는 과연 세상의 것들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가지고 있는가?
2. 달려갈 것(10~12절)
이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해야 하지만, 과거에 매달려서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앞에 있을 것을 잡기 위해 달려가는 태도가 필요 한다. 달려간다는 단어는 경기하는 모습이나 전차 경주에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그는 자신의 삶 전부로 그리스도께 포커스를 맞추었다. 우리의 상급은 무엇인가? 오직 주님을 바랄 수 있는 영성을 회복하도록 기도하자. 우리의 신앙은 화려한 과거의 이력을 나열하는 것이 되어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역사들을 써 가야 할 것이다. 주님 주실 상급 바라보며 위대한 꿈들을 꾸고,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달려가야 할 것이다. 비록 우리 앞에 눈에 보이는 성취가 드러나지 않아도 믿음의 순종의 경주를 달리자.
3. 푯대를 향하여 (13~14절)
푯대는 ‘주시하다’는 뜻의 스켑토마이에서 파생한 ‘스포코스’라는 단어이다. 마라톤 경주의 최종 결승점을 말하는 것인데, 경주자가 주시하는 것이 바로 이 결승점인 것처럼 우리도 신앙의 마지막 결승점을 주시하며 달려갈 것을 말한다. 축구선수라면 골대를 항상 주시하는 것이요, 농구선수라면 농구골대를 항상 주시하며 경기시간 내내 그곳의 초점을 놓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뚜렷한 목표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 않는가? 우리 삶에 목표점이 뚜렷하지 아니하면 분명한 삶의 변화를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 바울사도에게 있어서 그의 삶의 초점은 10-11절의 내용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었다.
Ⅲ. 정곡을 콱 찌르며
시골의 통나무집에 한 병약한 남자가 살았다. 그 집 앞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때문에 집 출입이 너무 힘들었다. 어느 날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바위를 밀어라” 그때부터 그는 매일 바위를 밀었다. 8개월이 지났다. 점차 자신의 꿈에 회의가 생겼다. 바위의 위치를 자세히 측량해 보니, 1인치도 옮겨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는 8개월 이상의 헛수고가 원통해서 엉엉 울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찾아와 그 옆에 앉으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들아! 왜 그렇게 슬퍼하지?” 그가 말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대로 지난 8개월 동안 희망을 품고 바위를 밀었는데 바위가 전혀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네게 바위를 옮기라고 (to move the rock) 말한 적이 없단다. 그냥 바위를 밀라고 (to push against the rock)했을 뿐이야. 이제 거울로 가서 너 자신을 보렴. 그 거울 앞에 우람하고 건장한 사내가 서 있었다. 우리 삶에 당장 변화가 안보여도, 주님 뜻 안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자” 예기치 못한 다른 층위에서라도 주님의 은총으로 인한 변화를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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