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송 : 70장 피난처 있으니
● 말씀 : 고린도후서 6장 9~10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설교 : 맡은 자
● 찬송 :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샬롬!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합니다.
우리교회는 비대면(언택트)시대에 ‘온라인 영상예배(온택트)’와 ‘가정예배’로 코로나 종식을 당기는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이번 주일(1월17일)에도 각 가정에서 예배서식으로 예배드립니다. 인도자와 기도순서를 맡을 가족을 미리 정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일설교 영상은 녹화하여 유튜브 링크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또는 가족이 함께 시청하시기 바랍니다. 차후 예배일정은 다시 공지하겠습니다.
2021년 01월 15일
김광영목사
제목: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Ⅰ. 마음 문을 열며
바울은 6장 1절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메시지의 울림 속에 하나님의 일군인 자들(4절)의 모습을 본문처럼 그려주고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일군’들은 무명하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다. 가난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다. 그런 속에서 유명한 자요, 살아있는 자요, 죽임당하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며,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
전문맥인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 보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알지 못한 비밀을 가진 자이다. 바울사도는 이것에 대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능력을 경험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행 14:22)한다. 하나님의 백성 그 일군들이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는 찬송을 지은 작가 ‘윌리엄 쿠퍼’는 ‘주 하나님 크신 능력’이라는 찬송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연약한 감각으로 주를 판단하지 마라. 그분이 은혜 주실 것을 믿어라. 언쨚은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을 숨기시도다. 그분의 목적은 빠르게 이루어지리라. 매시간 펼쳐지리라. 싹은 쓰디쓰지만 꽃은 달콤하리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고난을 결코 허비 하지 않으신다.
Ⅱ. 본문과 씨름하며
1.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9절)
바울은 온갖 환경을 다 겪었다. 그러나 슬픔과 큰 고통 속에서까지도 그는 자기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었고(9절), 물질적으로 아무리 가난했을지라도 영적 으로는 부요해 자신과 남들을 부요케 할 수 있었다(10절). 고든 브리저. 「고린도전서-갈라디아서」. 성서유니온, 『성경의 맥』 17. 1999. 66쪽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애통하여 그것을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다. 십자가로 우리의 모든 고난을 몸소 겪으신 그 주님 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애통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땅을 쟁기질하지 않으면 빗물이 씨앗에 가닿지 못한다. 그리고 떨어진 낙엽들을 걷어 내 주어야만 낙엽에 가려진 식물들이 햇빛을 받아 성장하게 된다”. 이렇듯, 깨어지는 시간이 도리어 성장의 틈새가 된다.
하지만, 건강의 악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 친구의 배신, 사람들의 무반응, 비방, 연약함, 과로 등 여러 가지 환경이 그리스도의 일군들의 영혼을 파괴하려 든다. 상황이 때로는 너무 나빠져서 삶 자체를 포기하게 한다.
이 때 우리는 ‘왜?’라고 묻는다.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이에 대답한다.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우리가 이 모든 환란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하심을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유지한다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발견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처한 고난의 상황에서도 이 조그마한 겨자씨를 알아볼 수 있는 민감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겨자씨가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드는’(마 13:31-32)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처럼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다.”
2.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10절)
고난의 첫째 목적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때 일시적으로 자신이 넘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무한한 안전을 누리게 된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나가는 첫 단계가 상실을 직시하고 애통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이것이다. 우리 고난을 더 큰 세상의 고난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우리만 예외적인 존재가 아니다. 남들이 고생하듯 나도 고생한다. 남들이 울듯이 나도 운다. 그리고 남들이 춤추듯 나도 춤춘다. 치유하는 것은 그 일차적 의미가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고통이 보다 큰 고통의 부분이라는 것, 우리의 슬픔이 보다 큰 슬픔의 부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기독교적 삶의 방식은 이런 상실과 외로움을 없애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값진 선물로 바꾸게 하는 것이다. 우리시대는 빠른 만족과 빠른 위안을 약속하는 거짓 신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상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우리자신의 한계를 보게 하고, 한계 너머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상처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시는 장소였다는 것을 우리는 후에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토록 크게 넘어지도록 그분이 허락하시는 것도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할 수 있게”(고후1:4) 하기 위해서이다.
Ⅲ. 정곡을 콱 찌르며
고린도후서 8장 9절에서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 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일군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오늘 본문처럼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자’ (고후 6:10)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고통이 우리를 정금 같게 단련하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받은 위로로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는 힘이 될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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