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이다.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하늘의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약속받은 사람으로 이 땅에서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는 또한 왕같은 제사장이요 그 분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말한다. 이런 신분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할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다.
◉ 본문과 씨름하며
1. 이방인 가운데 선한 행실을 가지며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것이다. 2:1의 악독과 궤휼 외식 시기 비방과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거룩하사 외모를 보지 않고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아버지 앞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1:7)으로 지내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 즉 이방인과 같은 자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한 투쟁이 있는가? 도리어 육체의 정욕에 나자신을 방치하여 이 땅이 나의 본향인 양 살고 있지는 않는가? 순례자로서의 나 자신의 정체감을 회복하여 선한 싸움을 이 땅에서 내 자신 안에서부터 싸우게 하소서
이 거룩한 투쟁은 이방인 중에 행실을 선하게 가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우리는 천국시민이기에 이 땅 위에서의 행위는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선해야 한다. 내가 악행하는 것을 트집잡아 비방하는 자들에게 선한 행실은 그들의 입술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2. 제도에 주를 위하여 순복하고, 자유하나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선한행실을 말하다가 인간이 세운 제도에 순복하라고 논리를 전개시킨다. 왜인가? 성도는 천국시민이지만 이 땅위의 삶을 영위하는 자들이기에 이 땅에서 땅의 질서를 준수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불신자들은 성도를 반사회적이며, 가이사에게 불충하고, 주종관계 질서를 무시한다고 비난하였기에 선한 행실은 제도에 대한 순복의 형태로 베드로 사도가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학교,국가의 제도에 대해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무관심하거나, 어쩔 수 없이 준행하거나, 내 자유를 걸거치게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사소하게 교통질서를 지키는 일부터 국가의 제도적 장치에 이르기가지 선한 행실로 적극적으로 순복하고 있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제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베드로사도는 제도에 순복하는 이유에 대해 밝힌다. 위에 보낸 왕이나 그가 보낸 방백이 하는 일은 악행자를 징벌하고, 선행자를 포상하는 일이기에 주를 위하여 순복해야 한다. 이러한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을 수 있다.
제도에의 순복은 일차적으로 주님을 위한 것이다. 내가 선한 일을 포상하고 악행자를 징벌하는 국가제도에 순복함으로서, 어리석고 무식한 비방자들의 불필요한 말을 막는 것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는 때로 힘들어도 제도에 순복하고자 하는가?
우리의 신분은 사실 자유자 이다. 하지만, 그 자유가 올바르게 사용되는 것은 “내 자유로 내 마음대로 한다”가 아니라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뭇사람을 공경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순복은 우리가 종되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자임에도 하나님의 종처럼 사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권세자와 사람들 믿지 않는 자들을 존중하며 복음안의 형제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있는가?
3. 주인들에게 순복하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음은 아름답다
주인에 대한 사환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해야 하는데,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두려워함으로 순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전은 누구인가?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그 분들이 때로 까다로운 일들 귀찮고 복잡하고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요구할 때도 순복할 수 있는가? 주를 위하여....
순복에는 고난이 따른다. 고난을 참는 경우가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는 경우인데 그것은 아무런 칭찬이 없다. 아이가 동생것 뺏어먹고 엄마한테 맞는 다면 당연히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참고 있는다고 “니 대견하구나”하는 사람없다. 또 한 경우는 애매히 고난을 받아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경우인데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대부분은 어떤 경우인가? 나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많지 않은가? 나에게 잘못이 없는데 선을 행함으로 애매히 받는 고난에 대해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판단해 주실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앞에서 그것을 잘 참아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나의 무죄를 아시고 그분이 반드시 밝혀주실 것을 믿으며 말이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하나님앞에 자신의 무죄와 왕앞에서의 무죄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간악한 무리들의 참소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 애매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함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봄으로 그 몸이 상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한다.
4.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이 되었다
선을 행함으로 받는 고난을 참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이것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참으사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내가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나를 부르신 목적에 합한 삶인데, 의를 위하여 핍박받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내 삶의 모습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그러한 고난을 당하셨음을 깊게 묵상하며 그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어떤 것인가? 죄가 있어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고 욕을 받으시면서도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죄를 담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심에도 고난당할 때에 자신을 변호하거나 욕받음에 대해 위협하지 않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며 나무에 친히 달려 그몸으로 나의죄를 담당하셨다. 이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의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그 분의 고난당함으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가 무엇인가?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되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은 것이다. 이로써 전에 우리는 각기 제길로 가는 양과 같이 가다가 길을 잃었지만, 이제 그분의 고난의 십자가로 인해 우리 영혼이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 정곡을 콱 찌르며
우리는 잃어버린 자리에서 돌아옴의 자리로 제자리를 찾았다. 그분의 고난이 ‘의’에 대해 살도록, 나음을 입도록 하신 것이다. 나의 고난당함으로 이러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면, 나도 그 고난 당함에 기꺼이 동참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신앙을 천국 구원티겟을 따놓고 안락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종교적 사치로 전락시키지 않았나? 나그네 시절에 고난 받기를 각오하자. 우리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너를 위해 몸버려 피흘려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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