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성탄절.
구유에 누인 아기 이야기를 낭만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참담한 현실이었습니다.
참담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방식을 그렇게 정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구유에 누워 있는 사람들,
마치 살갗이 벗겨진 것처럼 아파하는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주님이 이 세상에 도래하고 계심을 잊지 말게 하소서.
저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그리고 말구유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신 주님,
우리 또한 주님의 마음을 품어 우리 곁의 낮은 자들을 품게하사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울려 나가게 하옵소서.
마라나타 주님. 오십시오.
사랑이 메말라 버린 우리의 가슴 속에도 오시고
정을 잃어버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도 오시고
세상 도처에 떠돌고 있는 고단한 사람들의 마음에도 오소서.
오셔서 세상의 평화를 되돌려 주시고
이 세상이 생명으로 일렁거리는 새로운 공간이 되도록
우리와 함께 하여 주소서. 아멘
_김기석 목사 『거둠의 기도』. 두란노, 2019,각색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 하나님 나라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중략>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기형도의 “낡은 악기”, 그것은 줄이 다 끊어져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기타다.
이 악기가 소리를 낼 때가 있다. 그것은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다.
그래서 그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때 역설과 신비의절정이 경험된다. 그것은 “어둡고 텅 빈 희망”으로 상징되는 그의 텅 빈 마음이 기타통이 되고, 그의 몸 전체가 기타 줄이 되어 “이상한 연주”를 하는 것이다. 그의 “슬픔과 격정들을”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는)” 연주 말이다. 온갖 잡동사니 희망으로 가득 찬 기타에서는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는다. 희망의 공간이 텅 비어 있을 때, 비로소 몸의 시어詩語들이 튕겨지며 삶의 어둠을 승화시키는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그런데 독일어에는 미래를 뜻하는 말로 ‘Zukunft’도 사용된다. ‘~로’, ‘~에게로’라는 뜻을 가진 접두어 ‘zu’와 ‘오다’, ‘가다’라는 뜻을 가진 ‘kommen’이 합성된 단어다. 그래서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가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을 때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오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을 경우에는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을 의미한다.
‘Zukunft’라는 말은 ‘누구를[무엇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다’는 동사‘zukommen’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오심’, 곧 ‘Zukunft Christi’라 는 말의 원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과 피조세계를 향하여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로서의 미래란 인간의 시간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것을 의미하지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로 오는 미래요, 미래가 역사 안으로 들어오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마지막 때는 ‘인간의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위에 계신 하나님 (초월적 하나님),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내재적 하나님), 그러나 오시는 분은 우리 앞에 계시는 하나님이다. 미래는 시공간적으로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먼 미래적인 ‘우리 앞’이 아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래서 늘 가까이 있는 우리 앞이다.
역사를 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오심과 관련하여 미래를 이해하는 자는 주어진 현실에 그냥 머물지 않는다. 종말로서의 하나님의 오심을 생각하는 자는 ‘더 나은 시에 대한 희망’의 문작 만지작 거리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이땅에 주어지 것이다.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땅에서 깨어 그분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새 시대가 열렸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분이 우리 편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못하실 일이 없음을 분명이 보이셨다. 그 모든 일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웬만해서 믿기 어려운 이야기 이다.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의 도입부에서 이런 상황을 요약하고 있다.
(요일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시다.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신 분‘(2절)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소개한다. 그분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방치하신 분이 아니라, 친히 우리 삶 깊숙이 들어오셔서 우리가 직접 듣고 보고 만질 수 있게 우리와 함께 하셨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가 생생하게 주님과 교제하도록 날마다 구체적인 말씀으로 초청하신다.
마태복음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해 오셨다. 예수님의 일은 구원이며,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일이다. 창세전부터 시작되어 면면히 이어져 온 모든 주제와 기운과 운동이 결집되어, 최종 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곧 예수님이다.
마태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구약의 두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마가복음
마가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간다. 도입은 한 문장으로 끝내고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곁길로 벗어나지 않는다. 세상을 보고 경험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사건이 벌어졌으니, 마가는 어서 그것을 말해 주고 싶은 것이다. 그의 글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숨 가쁜 흥분의 기운이 묻어난다. 복음을 빨리 받을수록 우리한테는 좋은 것이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메시지다. 그 메시지란 하나님이 여기 계시며, 그분이 우리편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발표만으로는 굳이 뉴스라 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세기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나 신들의 존재를 믿었다. 사실 고금을 통틀어 인류전체의 의식주, 쾌락, 일, 가정 할 것 없이 다른 모든 관심사를 합한 것보다도 신이라는 문제에 더 많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에 계시고, 우리 편이시며,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쪽으로 우리를 적극 돕고자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뉴스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한 만큼이나 그 주제를 둘러싼 어림짐작과 뜬 소문도 엄청나게 많고, 그 결과 미신과 불안과 착취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마가는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 곧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사건들을 통해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서둘러 말해준다. 우리가 망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 수 있도록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열심히시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기에, 마가는 우리가 이것을 모른채 소중한 인생을 단 일 분이라도 허비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우리 대부분으로 자기 혼자만 겉도는 것처럼 느낄때가 많다. 다른 사람들은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고 소속감도 분명해 보이는데, 나는 따로 밀려나 어울리지 못하는 바깥 사람(아웃사이더)같다.
우리는 소속감이라는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배재하고 밀어낸다. 하나님 그 과정에서, 우리의 현실은 축소되고 삶은 협소해 진다. 끔찍한 대가가 아닐 수 없다.
종교라는 미명하에 이런 대가를 치를 때보다 더 비참한 경우도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종교는 오랜 역사 속에서 바로 그런 일을 해왔다. 하나님의 크나큰 신비를 그럴듯한 모임 규정 정도로 축소해 버렸고, 거대한 인간 공동체를 멤버십 수준으로 격하해 온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바깥사람, 소외된 사람이란 없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회복시키려고 왔다”(눅 19:10)
(눅 19:9-11)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세리장 삭개오을 찾아오신 예수님
누가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제 문이 활짝 열렸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만나시며 안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요한복음
성경의 첫 책인 창세게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세계를 존재하게 하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보이는 모든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하신 말씀으로 존재하게 된다.
요한은 창세기의 여는 말과 유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말씀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소개한다.
(요 1:1-2)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번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사람의 모습을 입고 역사속으로 들어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말씀대로 용서와 심판, 치유와 깨달음, 자비와 은혜, 기쁨과 사랑, 자유와 부활이 생겨난다. 망가지고 타락한 모든 것과 죄악되고 병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구원을 얻는다.
첫 창조이후 어디선가 일이 잘못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는 일이 절실히 필요해 졌기 때문이다. 바로 잡는 일 역시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인격속에서 나타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 정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요 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과 대화할 때 우리의 말에 품위와 무게가 실린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해답으로 강요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편안한 대화,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 자비로운 반응, 뜨거운 기도, 그리고 희생적 죽음을 통해, 구원을 선포하고 존재하게 하신다. 우리는 그 같은 말씀을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다.
(빌 2:5-11)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의 주되심이 복음이다. 그분은 먼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탄절로 이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에서 종의 본체로 낮아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몸을 십자가 위에 희생 제물로 드리셨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이 역설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로 스스로 내려가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주님은 낮아지심으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는 대림절, 나를 비우지 못해 타인이 들어설 공간이 내안에 없고, 시기와 교만 갈등과 반목속에 살고 있지 않는다. 그릇이 그 중앙이 비어있어야 다른 것을 담을 수 있는 것처럼, 먼저 우리의 마음을 비우는 태도가 주님을 영접함이여 이웃을 사랑함이다. 우리 속에 가득찬 것이 무엇인가? 이 시간 주님앞에 비우게 하소서. “주 달려 죽은 십자가 ...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높아지신 주님의 지위는 주(퀴리오스)이다. 당시 퀴리오스는 로마의 제국 종교의 황제에게 붙여진 칭호다. 실제로 로마의 제국종교를 이용해 교회를 핍박하려 한 이들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높이는 것이 무척 위함한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히 예수님을 퀴리오스라고 선포한다. 만물이 그 앞에 무릎꿇어야 함을 선포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예수, 왕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그 주님의 통치를 선포하며,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찬양을 드리자. 이 땅의 신음하는 만물과, 고통하는 인생들에게 큰 기쁨으로 좋은 소식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증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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