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2절은 여호와께서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치 노아 홍수심판을 연상케 한다. 이 심판에 여호와는 손을 펴사 유다와 예루살렘을 멸절하고, 그 희생의 날을 위해 자기백성을 희생의 제물로 준비하고 그들을 학살할 원수를 택하시고 계신다.
여호와의 큰 날은 가깝고도 심히 빠른 날이요 용사가 심히 애곡하는 날이다. 그분은 등불로 예루살렘에 두루찾아 무릇 찌끼 같이 가라앚아서 여호와의 심판을 조롱하는 자를 찾아 내사 그를 벌하신다.
2장에서는 1장의 피가 티끌같이 되며 살은 분토같이 되는 여호와의 큰날에 그 분의 날에 숨김을 얻을 자를 암시한다. 바로 여호와의 규례를 지키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 여호와를 찾으며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주변국가를 하나씩 거명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을 보여준다. 서편의 블레셋, 동편의 모압과 암몬, 남편의 구스와 북방의 앗수르와 그 수도 니느웨를 차례로 여호와의 칼날로 치고 계신다. 그분이 손을 펴시면 기쁜성은 황무한 곳이 되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며 손을 흔드는 곳이 된다. 그분은 교만하여 스스로 커진 모압과 암몬,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하는 니느웨를 향해 내 칼에 살육을 당하리라(2장12절)고 선언하신다. 그분은 여호와께 범죄한 (1장17절) 교만을 깨뜨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제 3장 본문에서 그 칼끝은 이스라엘의 심장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패역하고 더러운 곳, 포학한 그 성읍이 화 있을찐저!”
한바퀴 돌린 칼날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지만, 패역함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찌르고 있다.
이제 그 죄상들이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다. 그것은 명령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지 않고 여호와를 의뢰하지 않고 자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음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는 오직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 그리하면 내가 형벌을 내리기로 정하기는 하였거니와 너의 거처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경고하셨지만, 그들은 부지런히 그 모든 행위를 더럽히고 있다(3장7절).
여기 ‘그들이 부지런히’라는 말은 그들이 일찍이 일어났나는 말로 못된 행위를 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예레미야서 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했다?(렘7:13)했고, 또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 귀 기울이지 아니하였다(렘7:2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부지런히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반대로 부지런히 악을 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고 도리어 더 악에 발빠른 모습을 그려 보라. 마치 새가 그물로 빨리 들어가되 자기 죽을 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같지 아니한가?
그러나, 하나님은 불의한 방백들, 재판장들, 선지자들, 제사장들과 달리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않는 하나님으로 그들 가운데 거하고 계시다.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5절)의 ‘그 중’이라는 원어는 인체의 깊은 내장 혹은 뱃속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중심에 계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그들 중심에 거하시고 계시다. 그분의 공의는 매일 아침마다 나타난다. 역사의 바퀴는 비록 천천히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돌리시는 심판의 바퀴이다.
우리 안에 거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방심하며 수치를 알지 못하는 백성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 뱃속에 계신 것을 알고 계신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신약기자는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만 듣지 않고, 우리를 바로잡으시는 책망과 권면도 기쁘게 받지 않고, 다른 것을 의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며, 믿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두려우신 심판주가 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죄와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매주 설교를 듣지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매일 큐티를 한다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돈을 의지하고, 매번 기도한다지만, 우리는 그분께 가까이 가기보다 죄악과 가까이 살고있지 않은가? 아니 어쩌면, 예배의 시간 말씀의 시간 자체를 멀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가기를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현대인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는 예배를 빨리 마치고 나가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다. 예배의 본질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분을 가까이 함을 잃어버린 채 종교적 의무감만 남아서 드리는 예배를 그분이 과연 기쁘게 받으시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심판의 칼을 갈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나를 경외하고 교훈을 받으라’는 그분의 말씀에 재빨리 돌이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부지런히 악을 행하는 자리에서 부지런히 선을 행하며 여호와를 찾는 자리로 나가야 한다.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라고 하시는 분이다. 그 백성의 특징은 앞의 패역한 백성의 모습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 순결의 모습은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는 것이다(3장13절 상). 칼빈은 이 해석에 대해 요한 1서 3장9절의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를 인용하며 중생된 자는 전혀 죄가 없음이 아니라 죄악된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순결한 남은 자는 목자의 보호아래 있는 양들처럼,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다(13장13절 하).
우리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심령이 가난한자인가? 곤고하고 가난하여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인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우리의 교만은 우리를 패망으로 몰아가지만, 겸손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최근 우리의 삶은 어땠는가? 불신자들을 만나 “예수믿으세요”하면, 자신을 믿는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학벌과 외모와 언변과 재능과 인맥과 연줄을 믿고있지는 않은가? 이론적 무신론자는 아니어도 실천적 무신론자로 살고있지는 않는가? 정말 하나님 외에 다른 도울 이가 없음을 알고 그분만을 의뢰하는 곤고하고 가난한 자인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다’고 고백한 시편기자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호소하는가?
우리의 삶에 그것을 알수 있는 잣대는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전적인 의뢰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기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엄마품에 안김처럼 우리는 주님품에 안기길 오늘 기도했는가? 형식적인 기도 몇 마디 해놓고, 기도 생활한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우리의 삶에 오직 하나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한다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 가운데서도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남겨두사 그들이 순결한 백성이 되며 편안히 거할 것을 약속하신다.
14절에서 17절은 기뻐하며 부를 노래이다.
‘시온의 딸아, 이스라엘아, 예루살렘의 딸아’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남은 자들에게 기쁨으로 크게 소리지르며 원수를 이긴 승리의 부르짖음을 소리칠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형벌과 징계의 때는 지나갔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3장15절).
화를 당할까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며,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 것이다. 여호와는 우리 중에 계실 뿐 아니라, 우리를 구하실 ?전능자?시다. 그분은 ?용사?(warrior)가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신다. 이것은 성도들을 개선장군으로 영접하는, 하나님의 기쁨을 말함이다.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라는 말의 직역은 ?그는 사랑 안에서? ?잠잠하시다? 혹은 ?고요하시다?는 말로 하나님의 사랑은 고요한 중에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시온의 딸의 노래는 하나님의 즐거이 부리시며 기뻐하시는 노래로 끝맺어진다. 이 두 환호의 가운데는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침묵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 가운데 침묵으로 자리하시는 하나님, 너의 가운데 계신 하나님으로 기쁨이 터져나오고 있다.
하나님이 모으시는 그들은 누구인가? 시온에서 떠나 흩어져 유리하며 근심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시리라 하신다. 절기 때에 그들은 거룩한 성회를 열고 즐거워했으나 이제 그 일을 생각하면 그들은 더욱 슬퍼진 자들. 그렇게 ?근심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르켜 ?네게 속한 자라?라고 선포하신다. 여기서 ?네게?란 말은 시온을 가르킨다.
여기에서 주님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신 산상수훈을 떠올린다. 무너진 예배와 짓밟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 근심하는 자들 그들을 모아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온 세상에서 수욕 받는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신다.
19절과 20절에는 ?그때에?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된다. 이것은 이른바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이다. 스바냐 선지는 그 시작을 ?내가 지면의 모든 것을 진멸 하리라?(1:2)는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로 출발했으나, 그 끝에서 ?그때에? 있을 ?남은 자?들의 구원과 영화를 말함으로 끝난다.
20절은 19절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은 강조의 한 방법이다, 스바냐의 예언당시에 무덤 속에 던져진 것 같았던 유대인들이 언젠가는 다시 회복되어 존귀와 존엄의 자리를 되찾게 되리라고 믿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듭 반복하여 회복을 선언하며 노래하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이 회복의 노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회복의 메시지에는 두 개의 중요한 약속이 담겨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계신다는 것과 이스라엘로 천한 만민 중에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가운데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인가? 아니면, 부지런히 모든 행위를 더럽히는 자인가? 우리의 사회 속에서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히움을 보고 근심하며 애통하는자인가?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 영광스럽게 찬송되지 못함을 보며 가슴을 찢는 아픔을 가진자 들인가? 그리하여 그 나라를 위해 그분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그날에 칭찬과 명성을 얻는 자가 될 것이다. 기뻐하며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천하 만민중에 명성과 칭찬을 얻는자가 될 것이다. 성도는 이 영광스러운 그날을 소망하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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