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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105th 약속 '너희는 알지어다'_ 시편 100편-추수감사절

 

하나님의 일꾼들 이전에 예배자들을 원하신다.

실제로 유일하게 용납되는 일꾼들은 예배의 기술을 배운 자들이다.“

_ A.W. 토저(Tozer)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100:2)

 

1/ 여호와를 찬양하자는 초청(1)

[1]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2]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2/ 찬양의 이유 : 언약관계에 대한 묘사

[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3/ 여호와를 찬양하자는 초청(2)

[4]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4/ 찬양의 이유 : 여호와의 선하심

[5]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100:) [1] A psalm. For giving thanks. Shout for joy to the LORD, all the earth. [2] Worship the LORD with gladness; come before him with joyful songs. [3] Know that the LORD is God. It is he who made us, and we are his; we are his people, the sheep of his pasture. [4] Enter his gates with thanksgiving and his courts with praise; give thanks to him and praise his name. [5] For the LORD is good and his love endures forever; his faithfulness continues through all generations.

 

 

 

우리 시대를 표현한 짧은 문장들


 

지갑은 있는데 현금은 없다

통장은 있는데 잔고는 없다

 

친구는 있는데 우정은 없다

애인은 있는데 사랑은 없다

가족은 있는데 식구는 없다

 

연락처는 있는데 연락할 사람은 없다

시계는 있는데 시간은 없다

 

생활은 있는데 사생활은 없다

슬픔은 있는데 눈물은 없다

상처는 있는데 약은 없다

미래는 있는데 꿈은 없다

 

심장은 있는데 열정은 없다

머리는 있는데 영혼은 없다

 

나라고 불리는 나는 있는데

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나는 없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있는데, 삶은 없을지도 모르니

 


나뭇잎이 있는데 나뭇잎은 없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페렴으로 앓고 있는 존시는 살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방 밖의 잎만 세고 있었다. 그리고 간호해 주는 친구 수우에게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는 말을 한다. 그들의 밑층에 사는 화가인 베어만 노인은 40년 동안그림을 그리며 살았지만 아직 걸작을 그려 보지 못했다. 수우는 존시의 망상을 이야기하고 정말로 잎새와 함께 죽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한다.

다음날 아침 수우가 창문의 휘장을 올려보니 밤새도록 세찬 비와 사나운 바람이 불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벽돌 담벽에 담쟁이 잎새 하나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이 지나도 잎새는 여전히 붙어 있었다.

존시의 병세는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의사는 베어만 노인도 폐렴으로 앓고 있다는 말을 해준다. 그 날 오후에 수우는 존시에게 베어만 노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며 담쟁이 잎새를 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 헨리는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로 많은 이들 마음에 긴 여운을 남겼다.

 


오늘, 다섯절 밖에 안 되는 짧은 이 시편은 응축된 언어로 오늘의 시편을 짓고 주께 읊어 드린다.

시편 100편은 매우 짧고 간결한 시다. ‘감사의 시라는 표제를 갖고 있다. 이전 문맥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보아, 여호와 통치시편의 요약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언약관계를 기초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있는 감사와 찬양의 시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 작은 시는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애송되는 시의 하나다. 유대인들이 날마다 회당 예배 때 부르는 노래이며 크리스천들은 예배의 노래로 즐겨부른다.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처음 시작한 존 녹스의 친구 윌리엄 케티가 이 시를 교회 찬송가로 개작하여 1561년 발행된 영국-제나바 찬송가에 수록되었다. 이 시를 프랑스 개혁교 신자 루아 불죠아의 작곡으로 성가대가 부르면서 입당하는 찬송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 예배는 정규적 예배라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특별한 예배의식인 것 같다. 제목에 감사의 시라 함도 이 사정을 말해 주고 있다.

 

행복한 사람은 예배자이고, 예배자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예배자는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며 그 목자 되신 이의 돌보심 안에 살고 있음을 고백한. 우리는 그가 지으신 양이고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창조자 되심, 그리고 섭리자 되심이 예배의 이유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섭리의 선하심과 신실한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시편 100편은 이 천상의 보좌 장면의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다.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내실로 들어가서 그들의 왕께 합당한 찬양을 드린다. 이 시편은 매우 짧고 다섯 절에 불과하지만 마음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일곱 개의 명령문은 이 시편에 빠른 리듬감을 부여한다..

그 동사들은 부르다’(1), ‘섬기다’(2), ‘나아가다’(2), ‘알다’(3), ‘들어가다’(4), ‘감사하다’(4), ‘찬송하다’(4)이다. 이것들이 이 시편의 골격을 형성하며, 이 시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준다.

첫째,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전반부의 요청이다(1-3). 둘째,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심층적 초청이 있다(4-5). 표제는 이것이 감사의 시임을 확인해 주며, 특별히 이 시편은 감사의 시편으로 명명된 유일한 시편이다.

 

1/하나님께 나아가라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성전에서 성전 뜰로 향하던 시인은 발길을 멈추더니 온 땅을 향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친다. 그의 발끝은 오직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섬김과 사랑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이기도 한, 그가 평생 예배한 하나님에게로 말이다. 우리 발끝은 누구를 향하는가? ‘ 시편 63:1-4에서 시인은 외친다.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3).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리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신자는 고대 아테네 사람들처럼 미지의 신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다(3). 이 주권적이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두 가지로 생생한 예증이 주어진다.

 

첫째, 하나님은 도예가시다. 이 도예가께서 멋진 솜씨와 인내로 작품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어떠한 장애에도 움츠러들지 않으시고, 어떤 실망스러운 일에도 낙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영광스러운 그릇으로, 그분이 쓰시기에 흡족한 그릇으로 묵묵히 빚어나가셨다.

둘째, 하나님은 목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2/ 하나님을 알라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존재를 알 수 있다. 우리 존재가 명확해 질 때 하나님을 정확히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는 그의 것, 그의 백성, 그의 양이라는 사실만큼 가슴 뛰는 관계가 또 있을까?

 

3/ 하나님께 감사하라

 

시인은 갓 잡아 올린 생동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 이시기에 우리의 찬양도 산 자다운 찬양이어야 한다. 낡고 닳은 언어 대신 새롭고 신선한 언어로 찬양하자.

 

하나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꾸짖으셨다. 입이 입성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우상과 얼마나 닮았는가. 눈과 귀의 형체가 없어도 더 눈여겨 보시고 귀담아 들으시는 주님께 우리의 시편의 들려드리자.

 

히브리 시편은 환호성과 기쁨, 감격과 감사의 찬양으로 가득하다. 오경은 이 벅차오르는 감격과 환호를 화락차담(和樂且潭)이라고 묘사한다. 유교적 맥락에서 낙()은 솟구치는 기쁨이다. 외부에서 무엇인가가 주어져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기쁨이나 감정으로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다. ()은 온몸으로 누리는 즐거움이며 조건과 경계를 넘어서는 즐거움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와 같은 성어(成語)에서도 불 수 있듯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기쁨이다.

 

“~ 때문에에 불평하던 사람이 “`덕분에 관점과 언어를 바뀌며 삶의 감사와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일본 아오모리 현의 한 농부의 이야기다. 태풍이 심하게 불어 대부분의 사과가 떨어졌을 때의 일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농부는 실망하고 힘겨워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그 농부는 재미있는 발상을 하나 했다. 남은 사과를 포장해 정상 가격의 2-3배 높은 가격으로 백화점에서 판매를 한 것이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을 타깃으로 한 것이다. 태풍에도 끄떡없이 견딘 사과이니 대학에도 떨어지지 않고 잘 붙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담아서 판 것이다. 그 농부는 사과에 담긴 스토리를 팔 발상은 한 덕분에 태풍으로 인한 금전적 손실은 보지 않을 수 있었다. 소비자들은 그냥 사과 하나를 산 게 아니라 모진 태풍에서 끈질기게 붙어있는 사과의 끈기와 생명력을 산 것이고, 그 사과가 주는 행운까지 함께 산 것이다. 특별한 의미를 담은 창의적인 제품은 시장의 보편적 가격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고가에 거래되기도 한다.

 

우리의 삶, 추수감사절을 맞아 코로나와 경기한파와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힘든 일들도 분명히 있었을 줄 안다. 하지만 덕분에생겨난 감사를 볼 줄 아는 시각을 가지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그러할진데 하물며, 목자 되신 주님을 모신 우리는 더욱 감사의 제사를 드릴 수 있지 아니하겠는가? 세상의 풍작 때문에 눈물짓는다 할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 찬양드리자.

 

(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지휘하는 사람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인생은 고통의 시간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고 고해라고까지 표현한다.

성경도 로마서에서 만물이 피곤하며구속주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시편은 놀라움을 준다.

 

이 슬픔과 상실의 세상 한복판에서 감히 이런 울림을 외칠 수 있다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그 힘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그의 기르시는 양

23편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는

고백을 떠올린다.

 

그래서 감사의 찬송을 부른다.

그 선하심과 영원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노래한다.

이 땅은 배신과 불신 불성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모든 상실 속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그분의 신실함을 본다.

 

우리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며 그 앞에 나갈 수 있는 것

삶을 긍정하고 감히 흥얼거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한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끝까지 나를 돌아보시니’(찬송가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