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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102th 약속 /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출애굽기 7장

 

 

 

하나님은 모세와 오론을 다시 바로에게 보내시면서 모세는 신적 대리자답게 위엄을 가지고 바로와 맞서는 아론은 그를 대신하여 말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새로운 세계는 저절로 오는 법이 없다. 진주는 보드라운 삶을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자라는 법이다. 해산의 고통 없이는 새로운 세상이 없다.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의 대업을 위해 하나님은 먼저 완악한 바로의 마음을 꺾으셔야 했다. 그래서 그 땅에 많은 표징과 이적을 행하시려하신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아리라” (7:5)

1절에서 7절 사이에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반영하듯 내가혹은 내 손’, ‘내 백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출애굽 사건은 모세와 아론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 역사를 갱신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키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로에게 그분의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다. 아론이 모세의 지시로 바로와 그 신하 앞에서 지팡을 던진다. 뱀으로 변한다. 그러자 바로도 마술사를 불러 같은 일을 시킨다.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통해 나타난 변화의 이적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은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다고 말한다. 그것은 애굽의 마술사들이나 바로가 쓰고 있던 특권의 가면을 찢어내는 일이다. 이 사건은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인지 보여준다.

이런 두려운 경고를 받고도 바로는 모세와 아론의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은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이 피가 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아침에 바로에게 가보라고 이르신다. 바로가 나일 강가로 나올 터이니 거기 글 만나라는 것이다.

아침산책일까? 아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사막인 애굽에서 나일 강은 그야말로 생명의 젖줄이었다. 나일강이 없다면 그 땅은 죽음의 강이 되었으리라. 그렇기에 나일강을 신으로 섬겼다. 바로가 나일 강으로 나간 것은 그런 신들의 가호를 빌러갔을 것이다.

모세는 그 나일강에서 히브리 사람의 하나님 여호와’(7:16)의 이름으로 히브리인들의 해방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나일 강을 비롯한 애굽의 모든 물 근원을 지팡이로 치자 그 물은 모두 피로 변했다. 고기가 죽었고, 물에서는 악취가 났다. 사실상 생명의 젖줄인 그 나일강은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이들이 흘린 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로는 그런 일을 겪고도 자기 궁으로 태연해 돌아간다. 그 일에 관심을 아예 꺼버린다. 백성들이 겪는 고통에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애굽 제국의 맨 얼굴이었다.

 

 

닥쳐올 일은 닥쳐오기 마련이다.

나라의 큰 위기가 닥쳐와 바로를 비롯한 관료들이 그 상황을 통제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는 모습이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 묘한 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불편함을 참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을 숨어서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개구리 재앙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말한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 요구를 거절하면

내가 개구리로 온 땅을 치리라.” 경고하신다.

이 온땅은 애굽을 지칭한다. 애굽은 신격화된 바로의 성역이었다. 바로의 의지가 지배하는 땅이다. 하지만 개구리를 보내 그 땅을 치겠다는 말은 바로가 그 땅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겠다는 말씀이다.

온 땅을 치리라.”

바로가 바로가 태양신의 아들을 자처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경고를 심각하지 받지 않는다. 아론이 애굽 물들 위에 손을 내밀자 무수한 개구리 떼가 나일강에서 올라와 바로와 그 신하들과 백성들의 삶의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질서있게 운행되던 창조질서가 일시에 뒤흔들린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개구리를 끌어올리는 마술을 부린다. 결국 그렇쟎아도 개구리로 몸살앓는 그 땅에 개구리로 더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맨 처음에는 나일강에서 해병대가 올라온다. 개구리들의 출현이다. 밥솥에 쓰레기봉투에 현관에 창문에 개구리가 앉아있고, 목욕탕 화장실 배수구에서 개구리가 튀어 올라온다고 상상해보라.

바로는 여호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박에 없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재앙은 물러간다.

 

그런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이 완고해져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절한다.

 

이 재앙, 파리 재앙

 

아론이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자 애굽의 모든 티끌이 이가 되어 가축과 사람을 괴롭힌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곤충 혹은 모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바로의 성역에 제한없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목해 볼 것은 애굽의 요술사들이 이전처럼 따라하기 마술을 부려보려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 819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다.”

권능이라는 단어는 손가락을 히브리어에서 지칭한다. 이는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 신의 손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일이 이쯤 되면 바로도 그 사실을 인정할만한데... 그렇지 않다.

왜일까?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자기의 권위가 흔들린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재앙은 어쩌면 우매한 자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반복이다. 히브리인들을 해방하라는 요구, 거절할 경우에 닥쳐올 재앙.

 

이번에는 파리재앙이다. 그런데 한가지 달라지는 점이 있다.

이전까지 일어났던 재앙은 애굽 땅에 무차별적으로 내렸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곳에는 그 재앙이 미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왜일까?

이 재앙이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에게 일깨우고, 여전히 모세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고자 함이다.

 

이번에는 바로도 손을 들고 만다. 그는 모세와 아론을 부른다.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제사하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애굽에 있는 신 가운데 하나로 받아 들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세는 자기들과 애굽인들 사이에서 발생하지도 모를 갈등을 핑계로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우리는 광야로 나가서 예배를 드리겠다.”

바로는 마침내,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달라는 단서 조항을 단 채 이들이 광야로 나가는 것에 동의한다. 자기를 위하여 간구해 달라는 부탁도 빼놓지 않는다 (8:28).

 

얼마나 역설적인가? 하나님은 애굽제국과 바로의 체제를 흔들고 계신데, 바로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그는 여전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껏 애굽에 내린 재앙은 생활에 불편을 가져오는 정도였다. 하지만, 점차 생명에 대한 직간접적 타격으로 전환된다. 여러차례 표징을 주셨음에도 바로는 자신의 완악함 마음을 꺾지 않는다.

 

완악하다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하자크들러붙다.’는 뜻이다. 집착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집착이란 사로 잡힌 상태이다. 마음이 완악해 졌다는 말은 둔감하다는 말이고 집착에 잡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이다.

 

바울사도는 죄가 초래하는 가장 무서운 일 가운데 하나로 굳어짐을 들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내버려 두심이야말로 심판의 또 다른 표현.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

 

다섯째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들에서 기르던 가축들에게 닥쳐온다. , 나귀, 낙타, , 양이 죽기 시작한다. 4번째 재앙처럼 애굽인과 이스라엘인을 구별하신다. 애굽사람의 가축은 죽어나가도 이스라엘 가축은 한 마리도 안죽는다.

바로는 사람을 보내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굴복하는 순간 자신에게 덮씌워진 태양신의 대리자라는 가면이 벗겨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6번째 재앙은 악성 종기 재앙이다.

하나님의 지시로 모세는 화덕의 재 두 움큼을 가지고 바로 앞에 나아가 그 재를 하늘을 향해 날린다. 그 재가 온 땅의 티끌이 되었고, 그것이 사람과 짐승에게 붙어서 악성 종기가 생겼다. 마침내 재앙은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이르렀다.

애굽의 마법사들의 몸에도 악성 종기가 돋는다. 바로의 체제가 흔들리는 신호이다. 애굽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도 도무지 통제가 안된다. 그래도 바로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는 바로에게서 고난 받는 이의 대명사인 욥의 뒤집힌 이미지를 본다. 욥은 가축들이 죽고, 자기 몸에 악성 종기가 났을 때에도 하나님 대한 믿음을 상실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는 그런 일을 겪고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생각이 없다.

 

 

7번째 우박이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9:16)

재앙은 마치 통 속에 든 감자껍질을 벗기듯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벗겨내는 역할을 할 때가 있다. 재앙이나 시련을 겪으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유한함을 절감한다. 바로는 자신이 우주의 중심 균형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드러난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경외심을 잃어버린 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박 재앙을 예고하시면서 그 재앙이 내일 이맘때에 시작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로의 신하들 가운데는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아, 자기 종들과 가축을 집으로 들여 놓은 이들이 있다. 경고를 무시한 이들도 있다. 이렇게 해서 바로의 신하들이 분열되기 시작한다.

 

기약된 시간에 모세는 하늘을 향해 지팡이를 든다. 우렛소리, 우박, 번갯불이 애굽 땅 위를 가득 채운다. 우박은 사람과 짐슴은 물론, 밭에 있는 모든 채소를 치고 들에 있는 모든 나무를 꺾었다. 하지만, 고센 땅. 이스라엘이 거주는 곳은 피해가 없다.

바로는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시인하고 여호와의 의로우심을 인정한다(9:27), 그리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약속한다. 모세가 손을 펴자 우렛소리와 우박과 비가 그친다. 하지만.. 결정적 위기가 지나가자 바로는 또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뒤집어 버린다.

 

예화) 어떤 사람이 벼랑사이 출렁다리 지나가다... 심하게 다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주님 생명을 잃지 않고 이곳만 무사히 지난다면 제 재산 모두 헌금하겠습니다. 또 중간쯤 오면서 가만히 생각하다 주님... 전부는 너무 많구요. 여기만 무사히 건너면 제 재산 절반헌금을 헌금하겠습니다.” 이제 거의 다달았는데 다시 심하게 흔드렸다. “주님... 제가 농담 좀 한 것 가지고 뭘그러십니까?”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화장실 갈 때, 화장실 나올 때 맘이 싹 변하는 것이다. 바로만 그럴까? 우리도 주님에 대해 너무 쉽게 약속을 변경하지 않는가?

 

온 땅에 내린 흑암(메뚜리 재앙, 흑암 재앙)

 

지금까지 재앙은 바로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고, 온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8번째 재앙의 동기는 이스라엘 후손들이 대대로 여호와의 업적과 이야기를 나루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10:2)

바로 앞에선 모세와 아론은 바로의 교만함을 중히 꾸짖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메뚜기 떼가 온 땅을 뒤덮고 우박을 면한 남은 모든 것을 먹어 치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앞서 우박은 밀과쌀보리는 아직 자라지 않았기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여운을 남겨두었다. 희망의 조짐일 수도 또 다른 재앙의 서곡일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바로의 태도에 달린 문제였다.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밀과 쌀보리는 결국 메뚜기 떼를 불러들이는 계기도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메뚜기 떼의 공포를 잘 알고 있던 신하들은

왕이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10:7)하고 말하며, 바로에게 압력을 가한다.

결국 바로와 신하들은 히브리인들이 여호와께 예배드리기 위해 애굽을 벗어나는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제한을 둔다. 장정들만 가라. 모세는 남녀노소 양과 소 모두 데려나가겠다고 한다. 격양된 바로는 모세를 쫓아낸다.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온 땅에서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이 남지 아니하였더라.”(10:13)

 

푸른 것이 사라진 세상. 죽음의 세상이다. 메뚜기로 인해 땅이 어둡게 되었다는 것. 다음의 흑암재앙을 예고한다.

비로소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부른다.

이번만 나의 죄를 용서하고.. 이 죽음만은 내게서 떠나게 하라”(10:17) ‘이번만이라는 단어가 참 구차하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강력한 서풍을 보내어 메뚜기 떼를 몰아내신다. 그러자 바로는 또 고집에 잡힌다.

 

흑암재앙

 

9번째 흑암재앙은 사전경고도 주어지지 않고 즉시 시행된다. 모세가 하늘향해 손을 내밀자 애굽 땅위에 흑암이 내린다.

창세기의 창조사건을 거꾸로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 흑암이 가득 찬 세상에서 빛을 끌어내셨지만, 이제 애굽땅에 어둠의 장막을 펼치듯 어둠과 혼돈으로 채우신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다.

얼마동안인가? 잠시..하루? 아니다. 사흘이다. 사흘의 어둠으로 사람들은 서로 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움직이지도 못한다. 공포심이 그들을 사로 잡았다.

애굽인에게 최고의 신의 Ra’ , 태양신이다. 아멘호테프4세 파라호는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며 태양을 찬미하는 노래를 짓기도 했다.

태양신은 인간, 소떼, 새의 무리, 하늘을 나는 미물마저 창조하고, 푸른 초목, 물고기까지 돌본다는 내용의 노래이다.

애굽인들은 그 땅에 내린 흑임으로 태양신의 사라짐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 흑암은 그들의 신앙이 덧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공포이다. 3일의 시간이나, 그 끝나지 않을 것같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사흘은 언제나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바로는 모세에게 양과 소는 남겨두고 장정들과 어린아이들만 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모세는 가축 한 마리도 남겨둘 수 없다고 말한다.

바로는 대노하여 다시 자기 앞에 나타나면 죽이겠다고 모세를 협박하고 모세를 내쫓는다. 길고 긴 협상이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하지만, 바로가 내뱉은 죽이겠다는 위협은 역설적으로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