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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 89편 인자와 성실하심

 

시편 89 편 영원히 신실하심_요약

 

 

깨뜨리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만큼 약속의 가치가 떨어졌다. 약속을 믿었다간 희망 고문을 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어리석을 만큼 손해를 보더라도, 한 번 한 약속 끝까지 지키는 분이있다. 약속은 이렇게 지키는 것이라고 항변하는 듯한 그분의 진득함을 보라.

누군가의 약속은 쉬 잊히고 누군가의 약속은 발에 밟히지만, 그 누군가의 약속은 냉가슴에 사이다 같고 먹먹한 가슴에 찬양이 솟아나게 한다. 시보다 더한 울림을, 웅변보다 더한 선포를 시인의 노래에서 발견한다. 시인은 주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주님의 약속에서 발견했다.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가시 돋친 격렬한 불편(38-51)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광대한 고백(1-37, 52)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신뢰를 고백하는 서른 여덟 절이 고통을 토로하는 열네 절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헌신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결국에는 송축하게 만드시는 하나님 앞에 신뢰와 고통을 모두 드리는 것이다.

이전에 나를 인도하신 주, 장래에도 내 앞에 험산준령 당할 때 도우소서. 밤 지나고 저 밝은 아침에 기쁨으로 내 주를 만나리”( 존 헨리 뉴먼, “빛 되신 주, 비추소서”) 아멘.

 

 

가시돋힌 격렬한 불편

 

[46]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 [47]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48]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심판의 공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어떤 언약도 그러한 경험을 배제하지 않으며, 어떠한 믿음도 그러한 심판을 면제해 주지 않는다. 복음의 놀라운 점은, 믿음이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더 힘찬 노래와 더 굳건한 신뢰로 솟아나온다는 데 있다.

 

[49] 주여 주의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맹세하신 그 전의 인자하심이 어디 있나이까 [50] 주는 주의 종들이 받은 비방을 기억하소서 많은 민족의 비방이 내 품에 있사오니 [51] 여호와여 이 비방은 주의 원수들이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행동을 비방한 것이로소이다

 

[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광대한 고백

 

1/다윗 언약에 드러난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1-4)

 

[1]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교훈 [2]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3]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창조 세계와 맺으시는 관계의 특징이자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함- 이 찬양의 곡조를 이루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찬양의 주제로사, 이 감동적인 찬양을 구성하는 선율을 제공한다.

우리가 순례의 길을 가며 당황스러운 경험을 할 때에도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하심을 기쁘게 찬양할 수 있다. 우리가 비록 비틀거리고 거듭 의심할지라도, 그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에 힘입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차근차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운명에 변화가 생길 때,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바뀐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신중하게 증언하는 바는, 하나님께는 변덕이나 모순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많을 수 있으나, 속되거나 가치없는 부분은 한 군데도 없다. 하나님의 뜻에는 주저함이 없고, 그 약속에는 거짓이 없고, 언약의 헌신에는 오점이 없다.

 

 

 

 

여러 절에 이르는 하소연 뒤에 한 절의 찬양으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님을, 왜 떠나시느냐는 하소연에서 떠나지 말아달라는 기도를 듣고, 주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간구에서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결단을 들을 것이다.

 

탄식 속에 깃든 신뢰

 

시인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철회하고 다우시의 나라를 버리신 것같은 처참한 상황을 보며 탄식을 쏟아낸다. 왕은 땅에 떨어져 욕되게 되었고, 요새는 무너졌으며, 강탈당하지 않으리라는 나라는 울타리가 파괴되어 탈취를 당했다. 당신의 오른손으로 보호하시겠다고 하시더니 대적의 오른손을 높이셨다고 시인은 울부짖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원망이 아니다. 변명도, 책임전가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이제 스스로 회복하시라는 요구이다. 아프고 괴로우니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청이다. 하니님의 지혜와 능력을 신뢰하기에 드릴 수 있었던 기도이며, 그 백성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확신하기에 쏟을 수 있는 탄식이다.

진노 뒤의 은총

 

하나님께서 진로를 멈추시고 언약을 기억하여 다시 은총 베푸시길 간청한다. 하나님의 뒤대한 창조가 허무한 창조로 끝나지 낳게 해 달라고 한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버리셔서 이런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 말고는 이 죽음의 현실에서 구원 받을 길이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시인은 기댈 곳은 오직 여호와의 성실하시고 인자함 성품, 당신 백성의 수치를 자신의 수치로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의로우심이다.

 

우리는 눈을 들어 이 황폐한 장면 너머를 바라보며

항상 모든 일에 신실하신 분을 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_A. W. Pink

 

인간의 불성실함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히 신실하시다. 그분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데 영원히 신실하시다. 그분은 자기가 한 말을 절대 잊지 않으시고, 결코 약속을 저버리지도 않으시며, 언약을 어기시지도 않으신다.우리가 신실하지 않을 때라도 그분은 여전히 신실하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이 제왕 시편의 주된 핵심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드린 고뇌의 기도로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삼하 7:8-16)을 존중해 주실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여전히 신실하시기를 구하는 기도다. 이 시편은 레위인이며(대상 15:17-18), 현자로서(왕상 4:31)약속의 계보인 다윗 계보에 속한 기름 부음 받은 왕이 패배한 사건에 직면했을 때 그의 백성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중보한 에스라인 에단의 시편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환난에서 건져주실 것을 하나님께 간구한다.

 

기독교는 언약의 신앙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약속과 그리스도 이후의 약속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시시 때때로 언약을 맺으신다. 그 언약을 통해 구소그이 섭리를 이루시고 그 뜻을 이 땅에 펼쳐 가신다. 그리스도는 모든 언약의 초점이며, 성경 언약의 알파와 오메가 이다.

오늘 시편에는 인자와 성실이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는 동기, 그것은 인자하심 때문이다. 그가 우리와 맺은 언약을 우리가 의심치 않고 신뢰하고 살수 잇는 까닭, 그것은 그의 성실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로 우리는 그 언약을 믿고 그 언약의 믿음 안에서 안식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범죄하고 실패함에도 불구하고 진멸되지 않는 것은 그분과의 언약 때문이다. 우리가 범죄할 때 그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그 자신의 신실하심에 근거하여 기쁘게 우리를 용서하신다.

언약신앙이 가장 빛을 발하는 시간은 우리가 역경의 광야를 지날 때이다. 그 길이 아무리 어둡고 험해도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부는 바람이 아무리 거세고 추워도 우리가 흔들리지 아니함은 그분의 약속의 견고함 때문이다. 언약 신앙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존재기반이다.

 

비탄과 슬픔으로 갈가리 찢긴 듯한 시인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은 응답이 아닌 신뢰의 찬양이었으리라. 스스로 저지른 죄로 인해 돌을 맞더라도 인자와 성실하심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기도와 인생을 바꿀 유일한 하나님의 성품 아닌가.

 

히브리 시인의 노래를 온전하게 듣는다면 사랑노래처럼 들릴까? 시인은 떠나간 님을 기억하면서 힘겹고 어두운 시간, 절망의 시간에 잠겨있다. 그러나 절망 속에 자신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님이 주신 한 말씀 한 말씀, 내밀던 손길의 따스함과 열정을 되살린다. 그 복된 시간을 지금 여기에서 한 구절 한 구절 더듬고 있다. 지금 여기의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힘겹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지금의 희망이다. 그렇기에 다시 여쭐 수 있다. 님이여! 처음 그 약속 잊으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