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88편22절)
1-2절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
[1]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5절 고난 중에 있는 시인
[3]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8절 시인을 향한 하나님의 화
[6]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8]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12절 하나님께 부르짖는 시인
[9]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11]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18절 고난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
[13]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사람은 그 사람의 열정이 아니라 그가 견딜 수 있는 실제적인 고통의 양으로 알 수 있다.”
_C. T. Studd
인생에서 시련을 면제받는 신자는 아무도 없다. 고난은 믿음의 학교에서 결코 생략되거나 외면해도 되는 선택과정이 아니라 필수 코스이다. 성도들은 고통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승리하도록 붙드심을 받는다. 우리는 시편의 기자가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보며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런 어려움은 인생에서 흔하다. 하지만, 다른 시편들에서 시편 기자는 환난을 겪고 견고한 소망의 상태로 회복된다. 이 시편의 경우는 예외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절망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며 깊은 낙심을 떨칠 수 없다. 그는 아직 주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안팎으로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떨쳐 낼 수가 없다.
이 시편은 전 시편에서 가장 슬픈 시라 불릴 정도로 독특한 차별성을 지닌다. 이 탄식의 노래는 자신의 존재 깊은 곳에서 나오는 절망적인 부르짖음이며, 소시적부터 병에 걸렸거나 부상으로 아파온(15절_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사람의 고통스러운 기도이다. 평생 동안 그는 질병과 응답되지 ㅇ낳는 기도로 인해 고통했다.
시편은 인생의 모든 고통스러운 시기에 대해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에 이 특별한 시편이 포함된 것은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위해 적절한 것이다. 표제는 이중적 제목인데, 먼저 고라 자손의 찬송 시,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에 맞춘 노래로 되어 있다. 이것은 ‘고통의 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 시편의 절망을 묘사한다. 두 번째 제목으로 고핫 자손 출신의 음악가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묵상, 관조)로 되어 있다.
이 시편은 산채로 무덤에 묻히는 이미지(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와 물에 빠지는 이미지(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를 사용하여 불행을 묘사하고 있다. 차가운 땅에 있건 깊은 바다 속에 있건, 무덤은 극심한 고통을 대변한다. 이렇듯 절박한 상황에서도도 하나님의 이름은 네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1,9,13,14절). 그 어떤 고통도 기도할 힘마저 빼앗아가지는 못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의 인생여정 혹은 믿음의 여정에서 이런 어두운 밤을 경험하게 된다. 기도의 여정에서도 그러하다.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버림받음을 경험하는 밤이다.
이런 밤을 지나는 비밀은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할 힘이 없어질 때에라도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기도의 언어를 찾지 못하거든 기도의 두 손이라도 들고 있어야 한다. 두 손들 힘이 없거든 엎드려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고 내가 느끼는 절망과 참담함을 시편기자처럼 고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머잖아 새벽이 밝아 올 것이다. 밤이 지날 것이다.
곤고함 가운데 주님께 호소함이다. 간절한 호소의 내용이 절절하다. 삶보다는 죽음과 어둠이 가득 배어있다. 살아도 죽은 것과 진배없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만 가득하여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다. 이 몸뚱이로는 주님의 분노를 담아낼 수 없어 주님께 구하면서도 그 위엄에 짓눌린다.
그럼에도 시인은 덮여 오는 죽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주님을 우러른다. 인생의 유일한 길은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간구이다. 벗어날 수 없으나 벗어나게 해달라고 청할 수는 있다. 기도하는 이에게 주어진 은총의 시작이다. 호소와 기도 가운데 주님을 향한 오롯한 마음이 더 깊어지고 간절해진다. 우러르는 저 하늘과 자신이 처한 어둠 사이의 이 무한한 간격을 오직 주님만이 넘으실 수 있기에 오롯이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주 나중에야 고백할 수 있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자 인생의 전부임을.
아웃라인
1.도입
시인은 자신의 모든 몸의 기능을 통틀어 오직 기도소리를 통해서만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정도였다. 읽어 내려가는 것마저 고통스러운 이 시편에서,우리는 놀랍게도 가장 강렬한 삶의 의지와 만나게 된다. 마지막 버킷리스트마저 하나님에 대한 것으로 가득차 있다.
2. 본문
1/구원을 위한 기도-
죽음의 문턱에서 씨름하던 시인은 죽을힘을 다해 구원의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사람들은 이미 그를 사망 선고를 받은 자로 여겼지만,하나님만은 그를 산 자로,살려야 할 자로 봐주시길 간구한다. 그가 이렇게 부르짖을 수 있는 건 주께서 들으시리라는 생의 마지막 믿음 때문이리라.
• 절망의 심연에서 드리는 기도
시인은 어릴 적부터 겪어온 만성적인 고난으로(질병) 이젠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소생할 힘이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죽은 채 방치된 자처럼 여겨졌고, 그의 침상은 무덤처럼 여겨졌다. 얼마나 극심한 고통이고 끊어지지 않는 아픔이던지 이 시편 속에는 탄식과 부르짖음만 있을 뿐 아무런 신뢰나 회망에 대한 고백이 없다. 하지만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에서 회미한 신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신뢰가 없었다면 •주야로’ ‘매일’ 부르짖을 수 없었을 것이다.
2/고통에 대한 토로_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모든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마저 하나님이 다 떼어 놓으셨기에, 남은 친구라곤 고통과 외로움,두려움과 죽음뿐이 었다. 하지만 시 인은 하나님을 비난하기보다 기도하는 편을 택했다.
• 하나님이 침묵 속에서 드린 기도
시인을 두렵고 절망스럽게 한 것은 몸의 아픔만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님의 진노 때문에 죽음과 혼돈의 파도가 시인을 괴롭게 하고 있으며,하나님이 시인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시인에게서 얼굴을 숨기셨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구들까지 시인을 혐오하여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그를 뼈아프게 했다. 이제 그는 아무 데로도 빠져나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렸고 수렁에 빠졌으며, 극심한 고통에 눈마저 쇠약해졌다. 하지만 이것은 이해할 수는 없어도 모든 생사화복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시인은 이제 한 줌 남은 소생의 희망도 하나님께 두었을 것이다. 이유를 알아야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매일'(9
절) ‘주야로’(1절) '아침에’(13절) 수용하고 신뢰해야 알 수 있다.
3/살아야 할 이유_
시인은 구원의 하나님께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한 번이라도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의 행사를 목도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데,시인은 살아있을 때도 지금보다 더 나은 적이 없었다.
• 살아야 할 이유를 아뢰는 기도 : 시인이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나열한다. 죽은 자는 찬양할 수 없고, 구원의 기적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과 기사와 의로운 행동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음껏 찬양하고 죽을 힘 다해 선포하려고 살아야겠다는 것이다. 내가 하루라도 더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수지맞는 일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할수 있는가?
3.결론
절망과 죽음의 구덩이에서 시인은 아직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찬앙을 떠올리고,사람들과 나눌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했다. 이것이 그가 삶을 포기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명확하게 깨닫고 새롭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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