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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80th 예레이먀애가 3장 19-25절 _ 내가 그를 바라리라









예레미야애가 319~25

제목: 내가 그를 바라리라

찬송: 484장 내 맘의 주여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영화 <서편제>에 떠돌이 소리꾼이 산천을 주유하며 사철가를 부른다.

이 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 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허더라.“

구성진 소리에 실린 생의 무게가 수수하게 느껴져 가슴이 처연해 진다.

동복 교복을 사놓고 제대로 한번 입어보지도 못한 채 하복을 맞추어 가져왔다. 봄이 지나 이젠 여름 앞에 서 있다.

 

무슨 말씀으로, 대면예배를 시작하며 드릴까 고민을 하며 성경을 펼치다가, 예레미야서의 이 말씀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낙심가운데서 오히려 소망이 되는 선지자의 메시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로 아침마다 새로운 그분이 성실하심으로 나타나사 구하는 영혼에게 선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211절에는 끙끙 앓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온다.

(12:11) 그들이 이를 황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온 땅이 황폐함은 이를 마음에 두는 자가 없음이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되었다.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포로생활에 지친 동족들에게 각자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성실히 살라고 당부한다. 땅에 사는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섣부른 희망도, 변덕스러운 절망도 우리 삶을 어지럽힌다. 답이 없어 보여도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부여받은 생명을 살아내야 한다.

 

스타치오(Statio) 잠시 머물고 있는 자리라는 뜻의 라틴어다. 수도자들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의 의미를 묵상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명쾌하고 보편적인 답이 없어도,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반딧불처럼 미약한 빛이라고 만들며 살아야 한다. 절망의 시간을 횡단하며 희망이 틈입할 여지를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의 소망이 아니런가?

 

(1: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유다 왕 요시야시대. 요시야 이전의 통치자는 히브리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던 므낫세였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55년간 군림하며 이방신을 섬기도록 부추겨, 온 백성이 성적인 방탕에 빠지게 하였다. 왕하21장에 보면, 이러한 우상숭배 의식을 거행하던 중 자기아들을 제단에 올려놓고 불살라 버렸다. 거룩함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웅대한 솔로몬의 성전을 마술사와 매춘부로 득실거리는 우상숭배의 중심지로 타락시켰다.

 

(왕하 21:9)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꾐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여러 민족보다 더 심하였더라

 

예레미야가 태어난 때는 므낫세의 통치 기간 중 마지막 10년에 해당하는 시대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주위에는 악인이 우글거리고, 비열한 자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높임을 받는”(12:8) 그런 풍토를 목도하며 자라야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시야라는 왕을 세우셔서 유다의 이러한 위기에 소망을 주셨다. 요시야는 성전을 청소하는 일부터 나라의 개혁을 시작했다. 성전을 수리하고 복구하는 가운데 힐기야 제사장은 오래된 책 한 권을 발견했고, 그책을 요시야에게 가져가서 읽었다. 그것은 신명기였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는 악이 창궐했던 57년의 세월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손에 이 막강한 문서가 들려진 것이다. 요시야왕은 이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대로 개혁을 시행했다. 악질적 범죄가 중단되고 미신적 종교가 추방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신명기의 법대로 성전에다 제물을 갖다 바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설교한다.

(4: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4:3)

4:30에서는 풍자적으로 이렇게 꼬집는다.

 

(4: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네가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그런데 너 예루살렘아... 네가 화려한 옷을 입고... 눈 화장을 짙게하다니. 도대체 어찌 된 셈이냐? 너의 화장이 모두 헛된 일이다.”

속된말로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되는 것이 아니다.’

 

므낫세의 타락상에서 벗어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리며 믿음의 삶을 살고자 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외적인 노력만으로 부족함을 호통치고 있는 것이다. 외양간에 서서 말울음 소리를 낸다고 우리가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교회 안에 서서 찬송을 부른다고 해서 우리가 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에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았다.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예레미야가 전한 그 백성이 죄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비가 올 때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저장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한 것이다. 석회함으로 이루어진 유대 산지를 파서 거대한 웅덩이를 만들고 그 표면에 회반죽을 바름으로 확실한 방수를 한 것이다. 저장한 빗물은 더 이상 새지 않고 잘 보호되며 웅덩이 크기도 점차 거대해져서 하나님이 상당 기간 비를 안주셔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웅덩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잔꾀와 잔머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사 다른 차원의 새로운 훈련을 시키신다. 이스라엘 땅을 살짝 흔드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땅은 아프리카 판과 아라비아 판의 거대한 지각이 교차되는 단층대에 위치하고 있어 1년 크고 작은 지진이 260여 차례 발생한다. 3일에 이틀은 지진이 나는 것이다. 사람이 느낄 정도의 지진은 흔치 않지만 미세한 지진에도 온갖 수고를 다해 바른 회반죽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웅덩이에 금이 가고 물이 샌다. 그것이 바로 터진 웅덩이이다.

예레미야는 외친다. ‘더 이상 터진 웅덩이를 의지하지 말고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들은 스스로 웅덩이를 팠다. 그 웅덩이는 물을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다. 그 결과 삶의 가뭄을 맞았다. 적들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르고, 땅은 백성들의 죄 때문에 황폐하게 변했다. 그들은 시홀의 물(나일 강)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갔고, 유브라데스의 강물을 마시려로 앗수르로 갔다. 마치 그들이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예레미야서에만 애가가 있다.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한 후 예레미야가 눈물로 지은 다섯 편의 슬픈 노래다.

 

(1: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을 때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가까운 이들이 비극적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굴비 두름처럼 역인 채 먼 이방 나라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는 것도 고통이었다. 찬 이슬과 바람을 피할 집이 없는 것도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스라엘사람들이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속절없이 무너졌다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세상의 어떤 힘도 무너뜨릴 수 없는 만세반석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따. 그들은 넋이 나간 듯 하늘을 보며 믿을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울부짖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일어서야 했다.

 

이 장은 이 민족이 느끼는 고통을 표현하기를 계속한다. 화자는 민족이 화를 당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백성들이 겪은 것을 견뎌내었고 백성들이 본 것을 보았으며. 백성들이 의문했던 것을 의문했다.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간구한 대로 하나님이 행하시고 그를 기억하시리라고 확신한 화자는 확신의 다음 단계, 곧 확신을 회복시키는 단계로 나아간다.

318절에서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그렇게 소망이 상실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21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를 상기하며 그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시킨다.

예레미야의 이런 새롭게 된 소망은 무엇에 기초하는가? 22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심각하게 벌을 가하실 정도로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부도덕, 억압 그리고 장기간의 여러형태로 하나님께 죄를 지었어도, 주님은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새롭게 시작케 하실 것이다.

23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다. 이젠 똑같은 것의 재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해주시는 것이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사람이로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이 땅에 기업이나 분깃이 없다고 말하는 레위인들에게 내가 너의 분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게 한다.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34:9-11)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25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절에서는,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다고 말한다.

현재의 본문은 침묵을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집요할 정도로 강력하게 침묵을 유지하는것을 말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 본문은 패배의 자세에서 곧 있게 될 구원의 자세로 전환하는 침묵을 가리킨다.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자신이 흔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파멸로부터 안전하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확신은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조용함 혹은 평온함이라는 내용들 또한 이전에 쉼 없는 영적혼돈의 시간들이 있었음을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