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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79th 약속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_주약교회 김광영목사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이새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여호와의 지시를 받았다. 사울의 잠복된 적의가 예상되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간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명분을 제시하신다. 바로 이새를 희생제에 초청하는 것이다(1-3).

성읍의 장로들은 사무엘이 도착했을 때 그에게 인사를 드렸고 여러 가지 예비적인 의례들이 거행되었다(4-5).

이새의 아들들 중 일곱 명이 사무엘 앞을 지나가며 심사를 받는다. 그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호감을 주는 외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채 거절된다. 결국 다윗이 양을 치는 일로부터 소환되었으며,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성령이 다윗에게 임한후, 사무엘은 라마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6-13)

 

1-3절 사무엘이 사울로 인해 슬퍼함.

 

여호와께서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유감스러워하셨다. 16장은 사무엘이 사울을 슬퍼하는 것을 책망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거절하셨기에 그 슬픔은 부적절하다.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기름 뿔을 취한 다음, 베들레헴으로 갈 것을 지시하셨다. 하지만, 사무엘은 이러한 사명에 두려운 심정을 표한다. 이것은 모세나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위탁을 거절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새로운 왕을 기름붓는 것은 현직 왕이 사울이 위협을 느낄만한 일로 생각되었다. 사무엘의 반발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은 희생을 드릴 짐승을 취하라는 지시이다.

 

4-5절 성읍의 장로들을 초청함

 

성읍은 장로들을 만났다. 그들은 염려하는 중에 당신은 평강 중에 오십니까? 묻는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사무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어서 그로 인해 징벌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마 그의 방문이 정치적 암시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사무엘은 그들을 안심시키고서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준비하라고 촉구한다. 그런 다음 희생을 드리러가자고 요청했거나, 혹은 걱정을 잊고 자기와 함께 즐거워하자고 했다.

 

6-13절 아들들을 면접 봄

 

6절을 시작하면서 동사 보다를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사무엘은 엘리압을 본 뒤 그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을 자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 후보자의 용모나 신장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장남 엘리압은 거절되었다.

사무엘이 사울의 왕 세울 때 사울의 용모와 신장도 눈에 두드러졌다. 사무엘이 회상해 볼때 백성들은 외적인 것에 강한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여호와는 사람의 됨됨이를 진정알고 계신다. 7절에서 외모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는 눈들eyes”이다.

이새는 남은 모든 아들들을 사무엘 앞에 지나가게 한다. 그때마다 선지자는 현재의 그 아들들이 선택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비나답은 둘째 아들이었다. 셋째 아들 삼마가 등장한다. 이새의 아들들은 다윗을 포함을 여덟 명이었다.

이새는 일곱명의 아들을 다 지나갔지만 여호와께서 점지해 주신사람은 아직 아나타지 않았다. 사무엘이 남은 아들이 더 있는지 물어본다. 이새는 밖에 양을 치고 있는 막내가 있다고 한다.

여기 막내를 나타내는 하가톤이라는 단어는 가장 어릴 뿐만 아니라 가장 작다는 암시가 들어있다. 가장 별 볼일 없는 인싸가 아닌 아싸라는 것이다. 그는 가장 어렸고 아마도 가장 작았을 것이다. 또한 가족 전체가 모여 사무엘을 만나는 사이 양떼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다윗이 불려져 나온다. “붉은붉은 빛의 피부색이나 머리털을 지시할 수 있다. “아름다운 눈을 가지다윗이 왔다.

여호와께서는 3절에 약속한 대로 사무엘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한다(12), 사무엘은 기름 뿔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13). 그리고 이후로 성령이 계속 그와 함께 하셨다. 다윗은 이제 신적인 법에 의한 왕이었다.

 

(딤후 2:20-21)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NIV>

 

(딤후 2:20-21) [20] In a large house there are articles not only of gold and silver, but also of wood and clay; some are for noble purposes and some for ignoble. [21] If a man cleanses himself from the latter, he will be an instrument for noble purposes, made holy, useful to the Master and prepared to do any good work.

 

 

1. 깨끗한 그릇

 

(1) 큰 집의 여러 그릇

 

오늘 성경본문에 보니, 큰 집에는 그릇이 있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 중에는 금으로 된 것도 있고, 은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다. 반면에 나무를 깎아 만들거나, 흙을 구워낸 질그릇도 있다.

큰 집은 하나님이 주인 되어 관리하시는 이 세상이기도 하고, 친히 머리되어 다스리시는 교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통치 속에 살고 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듯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다스리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맞다!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세상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잊고 사는 것 같다.

 

그 큰 집에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이 있는 것이다.

못생긴 그릇, 잘생긴 그릇, 큰 그릇 작은 그릇, 주근 깨난 그릇, 여드름 난 그릇, 금처럼 비까번쩍하는 그릇도 있고, 나무처럼 투박하게 보이는 그릇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두가 그릇이라는 것이다. 그릇끼리는 내가 잘 났니 니가 잘 났니티격태격 싸울 수 있지만, 주인 앞에서는 똑같은 그릇일 뿐이다. ‘도토리 키재기이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피조물일 뿐이다.

우리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어쨌던 이 그릇들은 귀하게 쓰이기도 하고, 천하게 쓰이기도 한다. 불필요한 그릇은 아무것도 없다. 밥그릇도 있어야 하고 간장종지도 있어야 한다.

9:21-22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를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겠느냐?’고 묻는다. 우리 삶에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신본주의 신앙이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다른 비유로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에게 한 몸의 각지체로서의 성도들의 모습이 표현된다.

 

(고전 12:14-21)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주님은 당신의 필요대로 각각 다른 모습으로 우리를 그 몸의 지체로 주셨다.

 

(2) 귀히 쓰는 그릇

 

, 그럼 주인은 과연 어떤 그릇을 사용하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질그릇보다 금그릇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귀히 쓰이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아무리 금으로 반짝거려도 곰팡이 핀 그릇에 밥 퍼려고 하겠는가?

 

그릇이라는 말은 고대문헌에서 비유적으로 사람들을 의미한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처럼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공예가들도 좋은 그릇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초벌구이에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하고 높은 열에 담금질하며 많은 시간과 관심과 공을 들인다. 그렇게 그릇하나가 이루어지는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어떤 그릇이든지 깨끗한 그릇을 쓰기를 원하신다. 금 그릇이라도 깨끗하지 못하면, 주인이 쓰지 않고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귀한 그릇으로 주인이 사용하신다. 누구든지, 어떠한 사람이든 어떤 외모에 성격에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 사람은 외모를 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깨끗해 해야 할 이런 것이란 무엇인가? 16절의 망령되고 헛된 말과 18절의 진리에 관하여 그릇된 것 19절의 불의한 것 이런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깨끗한 그릇에 보화를 담길 원하신다. 우리는 금그릇에 보화를 담길 원한다. 하지만 보화는 깨끗한 그릇에만 담아주신다. 우리는 어떤 그릇인가? 우리는 자신의 그릇이 좀 더 화려하고 빛나게 만드느라 많은 경력도 쌓고 이력서에 적을 자격증도 따고 사회적 명성도 쌓아 튀어 보려고 하지만, 진정 우리의 속에 가득 찬 욕심과 탐심의 죄는 씻어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가?

 

컵의 외모에 광칠하느라, ‘은 보지 못하는 우리는 아닌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신다이렇게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함을 받고 말씀 앞에 정결하게 사는 자 죄를 피하고 의를 좇는 자는 거룩한 자이며,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자이다.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된다.

깨끗한 그릇은 당장 귀하게 쓰임을 받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중히 쓰임을 받게 된다. 깨끗한 그릇에 더러운 물건을 담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하물며 하나님께 자기를 정결케하고 기다리는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귀히 쓰임을 받게된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재주가 많은 사람이나, 학식이 많은 사람이나,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심령이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아무리 능력이 탁월하고 외모가 뛰어나고 경건의 모양이 있어도, 은밀한 죄악에 물들어 있고, 더러운 말과 행실을 일삼는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를 가까이 두고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버텨야 한다. 이 뜨거운 불 속에서 버텨야 산다.

960도 은이 녹았다. 1063도 금도 녹았다.

그리고.. 끼익

흙은 버텼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도자기로 태어났다.

버티자 중요한 것은 어떻게 태어났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티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