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라의 노래
“이 날에 드로바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노래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 순서에 있으니까 순서를 따라 부르는 것도 아니다. 노래할 이유가 있을 때는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노래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노래할 이유를 갖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헌신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헌신된 자들을 통해서 그의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찬양은 구원의 감격이 되고 신앙의 고백이 되길 바란다.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주를 위해 사는자 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여호와를 찬송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 하였기 때문이다.” <5:2> 그리고 패배한 가나안 왕들과 방백들에게 외친다.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5:3>
시인이 이토록 의기양양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누구시길래 찬송하리라고 선언하는 것인가?
시인은 하나님의 과거의 구원의 행동을 먼저 낭송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 산들이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니 저 시내 산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진동하였다”<4-5>
초기 가나안 정복전쟁시에 하나님이 친히 앞서 나가시며 자연을 동원하여 싸우신 것을 뵤사한다. 우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땅과 산들이 진동하고 떠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여호와께서는 홀로 이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헌신된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이 전쟁을 수행하신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우리를 삼으시는 것이다.
그러면,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5:6> 가나안 사람이 큰길을 통제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소로로만 다닐정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치고 그쳤다” 지도자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는 형편없었다. 전쟁이 성문에 이쳤으나, 이스라엘 병사들은 방패와 창 같은 좋은 무기를 가진자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철병거 900승을 지닌 장군 시스라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이다.
도대체 왜 이스라엘은 이런 처참한 모습이 되었다.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 명 중에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8>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다른 신 새로운 신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무력화 될 때 하나님은 그냥 버리두시지 않았다. 비록 새 신을 섬겨 잠시 분노하여 자기 백성을 징계하였다 할지라도 자기 백성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다.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 어미가 되었도다”<5:7> 그리고 드보라는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송하라”<9>고 외치고 있다.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10-11> 하나님의 구원은 의로우신 일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을 실천적 무신론자라고 한다. 드보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고 그 분께 삶을 맡김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체험했다.
말을 타는 부유한 자든, 길을 걷는 가난한 자든, 전쟁터에서든, 여인들의 물긷는 곳에서든 여호와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전투는 끊임이 없다. 하나님나라가 최종적으로 임할 때까지는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이다. 계솓되는 전투를 위해서는 헌신된 용사들이 필요하다.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르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12> 패배한 사탄의 목을 밟고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며 승리의 축배를 들 날을 고대하며 오늘의 전투에 매진하자.
여호와의 전쟁에 목숨을 걸고 나온 지파도 있었고, 강거너 불구경하듯 하는 지파도 있었다. 목숨을 건 지파는 에브라임, 베냐민, 요단 서쪽 므낫세 반 <마길>, 스불론, 잇사갈, 납달리 지파 뿐이었다. 특별히 스불론, 납달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르우벤은 큰 결심은 했으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한가한 목축생활을 방해받기 원치 않았다. 전투 나팔 소리보다 한가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선호한 것이다.
길르앗과 단과 아셀은 아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요단을 거너올 마음이 없었다. 단지파는 배를 타고 무역하며 상업하는 일에 바빴다. 해변가에 살던 아셀은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우리는 주님의 일에 어떤 지파의 모습과 같은가? 싸우고 있는가? 고민만 하다가 앉아 있는가? 아예 귀 기울이지도 않고 자신의 일만 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형제의 고통에 무관심한가? 아니면 마음을 같이 하는가?
그같이 모여 전투한 결과는 어떤가? 시스라의 철병거 군단은 별들의 전쟁으로 패배하고 만다. “별들이 하늘에서부터 싸우되 그 다니는 길에서 시스라와 싸웠도다”<20> 가나안 신화에서 비의 근원은 별들이라고 믿었다. 별들이 시스라와 싸운 것은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이미 드보라는 여호와께서 친히 전장에 나서시면 “하늘이 물을 흘리고 구름이 물을 내린다”는 사실을 선포했다.<4> 계절천인 기손강은 쏟아지는 하늘의 비를 감당치 못하여 급류로 벼나였다. 시스라의 군대는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러기에 드보라는 “기손 강은 그 무리를 표류시켰으니 이 기손강의 옛강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신다. 전쟁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는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그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저주받는 자와 축복받을 자가 대조되고 있다. 메로스와 야엘이다. 이스라엘 거민은 여호와를 돕지 않았는데 반해 그저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은 족속인 겐사람 야엘은 여호와의 전쟁에 동참했다.
샬롬피자는 미동인데 불신자인 거제도 횟집은 주일날 성경공부 장소를 제공했다.
전혀 기대치 않은 인물이 여호와의 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이다.
시스라는 물을 구하고 있다. 물이 너무 많아 급류에 부하를 잃더니 이제 물이 없어 갈증을 느끼고 있다. 이 시스라엑 물대신 우유를 준 야엘은 말뚝과 망치로 시스라를 죽인다.
시스라의 죽음은 슬로모션으로 그려진다. “그가 그의 발 앞에 꾸부러지며, 엎드러지고 쓰러졌고, 그의 발 앞에 꾸부러져 엎드러져서 그 꾸부러진 곳에 엎드리져 죽었도다”<27>
조야한 장막에 거하는 야엘과 좋은 집에 거하는 장군의 어미가 대조대며 그려진다. 홀로 있는 평범한 여인과 지혜로운 시녀를 그느린 시스라의 어미, 시스라를 거꾸러 뜨린 여인과 아들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초조하게 기다리는 어미으 모습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시스라의 어미와 시녀는 승전하고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할 때 여인들이 춤추고 노래하듯 승리를 그리면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전쟁에 이기고 전리품을 얻어 이를 나누느라고 지체하는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 반대였다.
우리의 영적시각은 얼마나 깨어 있는가?
드보라의 노래는 이렇게 맺어진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 하니라”<5:21>
태양이 힘있게 돋는 모습, 2000년 해맞이를 본 적이 있다. 어둠을 물리치고 지평선을 꿰어차고 수평선을 끊게하며 찬란히 솟아오르는 태양에 사람들은 숨죽었다. 태양앞에서 어둠의 세력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사랑하는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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