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님의 약속 말씀

73th 약속_유다가 먼저 올라갈지니라_ 사사기1장 김광영목사






그렇다면, 우리는 왜 사사기를 읽고 설교하는 것을 들어야 하는가? 언뜻보면 우리와 관련없는 남의 역사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사사기는 3천년전의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쓰여질 때부터 당시의 선택된 민족 뿐 아니라, 오고 오는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왜 굳이 과거의 역사이야기를 통해 이런 일을 하시길 원하는가? 역사이야기는 자기 정체성 확립의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의식과 지능이 있음에도 기억을 상실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상실케 된다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사사기는 안식의 땅 가나안에 들어왔음에도 계속적인 고난을 겪는 시대로 묘사된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예수를 믿음에도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실제로 평안이 없는 삶속에 놓여져 있지는 않은가? 사사기는 우리의 거울이 되고 있다.



그들이 이런 고난가운데 있게된 것은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두가지 사명을 감당치 못했기 때문이다.

첫째,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약속의 땅을 완전히 정복하는 것<23>

둘째, 가나안인의 풍습을 본받지 않으면서 여호와의 왕국을 실현하는 사명<24>






사사기 1


사명의 미완수, 징계, 구원으로 이루어진 사사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본문은 여호수아가 죽은후에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왔으나,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 없이 하나님나라를 세워나가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우리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온 후에 중보하시는 왕인 그리스도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하나님 나라를 책임지게 되었다.

여호수아가 떠났다고 해서 그들은 마냥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이땅에 들어온 데에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들은 여호와께 질문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 전투하는 사명이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혔노라”<1:2>

하지만, 유다는 시므온과 함께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형제의 동맹은 인간편에서 보면 적절하지만, 상세히 보면 유다는 여호와의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순종했다. 인간적으로 보아서 혼자 가는 것보다 형제와 동맹하여 가나안인들과 싸우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유다의 이같은 자유결정은 비록 여호와의 뜻에 합하지 않았지만 처벌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는한 하나님은 인간의 자기 결정을 용납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이스라엘이 각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동하는 역사의 암흑기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게된다.<17:6>

유다지파가 땅을 얻는 이야기에는 두 개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아도니 베섹의 에피소드는 죽음과 저주의 길을 보여주고, 악사와 옷니엘의 이야기는 생명과 축복의 길을 보여준다.

베섹은 엄지 손발가락이 잘린채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죽은 반면, 악사와 옷니엘은 생명의 근원인 땅과 샘물의 근원을 얻고 있다.

 

엄지를 끊는 것은 다시금 무기를 잡을 수 없게하고, 상아래서 먹을 것을 줍게하는 것은 노예를 개처럼 취급하는 당시의 잔인한 전쟁풍습이었다.

그렇게 막강한 권력의 주인공인 아도니 베섹이 유다지팡의 군대에 잡혀 오히려 엄지를 찍히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잠시 영화를 누리며 행복을 누리는 것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중에 임하시는 그날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베섹은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한다.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복수의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여호와는 언약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에서 보호하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궁극적인 움녕은 역사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받아들이느냐 받아 들이지 않느냐에 달려있다.

 

신부인 악사가 신랑인 옷니엘을 시켜 자기 아버지에게서 밭을 얻어낸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밭은 강수량이 많지 않은 네게브 남방지역이었다. 이곳은 건조한 반사막지역이었기에 그곳은 절대적으로 샘물이 필요한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충성하기만 한다면 약속의 땅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땅을 요구하여 받을 수 있고, 또 샘물도 얻을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나안인들과 싸울 용기와 신앙이 있다면 얼마든지 풍요로울 가능성이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온 그들이 젖과 꿀을 얻을 수 있는 두가지 요건은 남아있는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본문의 지파들은 실패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가장 강한 두지파 유다와 에브라임지파 마저도 실패하고 있다. 유다지파는 철병거 때문에 계곡의 주민들을 몰아내는데 실피하였으며 <19>, 에브라임지파도 서부지역의 게셀을 정복하는데 실패하였다 <29>

우리는 이런 실패를 보면서 쉽게 정죄할 수 있다 바보같은 친구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40년광야를 살아남고 요단강을 맨땅으로 건너고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이렇게 쉽게 주저앉는다는 말인가?“ 하지만, 원래 인간은 남의 실수는 크게 보이고, 자기 실수는 작게보인다. 자기눈의 들보는 못보면서 남의 눈의 티를 빼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현실적 조건을 보면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그 소수지파들이 정복하지 못한 도시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전략적 요충지 요새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용서될 수 없다. 그들은 이들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를 건설할 소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지않는 사람들 속에서 철병거와 같은 강력한 세속적인 악과 대응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또한 그 일을 감당하라고 하신다. 우리가 복음전하는 것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땅끝까지 이르는 증인됨이 우리 주님의 명령이시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은 유다가 요셉지파처럼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도 있지만, 단처럼 도리어 쫓겨갈 수 있다.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을 보지 말고,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승리를 얻자



여호수아가 죽은후에


사사시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나님나라를 위해 크게 헌신할 수 있는 시기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시기에는 그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사시대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시기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1:12)고 말씀하신다. 공격하는 자가 가장 좋은 것을 차지할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8)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심고있나?

 

유다지파의 진격


우리는 얼핏 어려운 사람들끼리 어울려 살면 좋지, 왜 이렇게 가나안 사람들을 미워할까싶지만, 아도니 베섹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지나치게 교만하고 악한 자들이다. 마치 암세포와 같아서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또 번져나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죄의 뿌리를 철저히 뽑으라는 것이다. 암을 수술할 때 그 뿌리까지 캐지 않으면 다시 발병하는 것과 같다.

다른 지파들은 유다처럼 싸우지 못했다. 그들은 타협했고 병거가 없다고 불평했고 죄와 싸우지 못했다. 1장 후반절에는 쫓아내지 못하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이 계속나온다.

 

타협과 공존


그들은 왜 타협의 길을 선택했나? 광야에서는 하나님 말씀만 들으면서 그가 주시는 만나면 먹고 살면되었다. 하지만, 가나안땅에서는 스스로 먹는 문제를 책임져야 했다. 이들에게 농사는 생소한 일이었고 일손도 많이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 쫓으라고 하신 가나안 원주민들은 농사짓는 일의 전문가 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너무 잘 적응하려 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적응하는데 정신이 뺏겨 하나님이 왜 자신을 이곳에 보내셨는지 잊어 버렸다.

그들을 쫓아내려는 열정을 잃어버렸다. 굳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그들이 자진해서 일을 해 주겠노라고 나설 때 그들을 죽이기 보다 일을 시키는 것이 낫다. 그들은 이기적인 생각과 욕심 때문에 가나안에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을 놓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에게 틈을 보였다. 이스라엘이 목숨걸고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을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결심하고 거했다고 말한다.

죄와 싸울 때는 틈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입장을 분명히 해야한다. 단 지파는 이 의지가 없었다. 그들은 영적전투를 원치않앗다. 그저 이 세상에서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스도인들은 힘들게 살 각오를 해야한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목적은 잘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