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장 6-7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이 받아본 선물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나요? 아니면, 전해준 선물중에 가장 인상남은 것이 있나요?
천안소년교도소 교정위원시절, 청소년들이 선물이라고 내민 작은 화분과 꽃을 보며 너무나 뜻밖의 선물, 또한, 그들이 힘든 중에도 희망을 품고 사는 그 삶이 오롯이 담긴 그 화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물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이는 우리를 위해 한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가 세계를 통치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온전케 하시는 왕’이라 불리리라!
그분의 통치권 점점 커지고
그분의 온전하심, 끝이 없으리라.
그분은 역사적인 다윗 보좌에 앉으셔서
약속된 왕국을 다스리시고
그 왕국 굳게 세우셔서
세세토록 다스리실 것이다.
공정함과 올바름으로
이제부터 영원까지 다스리시리라.
만군의 하나님의 열심이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
Wed, 25th Dec 19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해오셨다. 예수의 일은 구원이며, 아주 오래된 일이다. 창세전부터 시작되어 면면이 이어져 온 모든 주제와 기운과 운동이 결집되어, 최종모습으로 드러난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마태는 독자들에게 메시아가 오심으로 구약의 두 예언이 성취 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NIV>
(사 7:14) 『Therefore the Lord himself will give you a sign: The virgin will be with child and will give birth to a son, and will call him Immanuel.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NIV>
(미 5:2) 『"But you, Bethlehem Ephrathah, though you are small among the clans of Judah, out of you will come for me one who will be ruler over Israel, whose origins are from of old, from ancient times."』
예수께서 오심으로 새 시대가 열렸다.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분이 우리 편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면 못하실 일이 없음을 분명히 보이셨다. 그 모든 일이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드러나고 이루어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웬만해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너무 좋아서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요한은 그가 쓴 첫 번째 편지의 도입부에서 그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일서 1:1-4)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4:4에서는 말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성육신이 일어난 시점을 추정해 보면, 주전 5년, 즉 헤롯 대왕이 사망한 주전 4년보다 1년 앞선다. 그 때 일어난 특별한 이유라도 있을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의 가족을 통해 온 세상을 축복하겠다고 약속하신 지 어느덧 2천년이 흐른 뒤였다.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하나님이 “기한이 찼을 때”(갈 4:4, 새번역)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하지만, 그 기한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함구한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많은데, 특히 당시의 사회 정치적 상황과 관련된 것이 많았다. 확실히 몇몇 요인들 덕분에 복음이 더 빨리 확산되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좋은 환경이 마련되었다.
첫째, 제국에 ‘팍스 로마나(Pax romana)’시대가 왔다. 곳곳에 군대가 배치되어 평화를 유지하고 대륙의 도둑과 바다의 해적에게서 여행자들을 보호했다.
둘째, 헬라어가 제국의 공용어가 되어 70인역(헬라어 구약 성경)이 통용되면서 복음전도가 쉬워졌다.
셋째, 사람들 사이에 영적 갈망이 커졌다. 로마의 구닥다리 신들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신비 종교들은 개인에게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지만, 영적 만족감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영적 갈급함을 증명해 주는 데 그쳤다. 그리고 회당 가장자리에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높은 윤리적 기준에 매료되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한 대상이 바로 이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10년만에(주후 48-57년), 바울은 갈라디아,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 이렇게 로마의 네 지방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 15:19)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세계 복음화를 위한 때가 무르익었다.
마태는 종합적인 정황을 내놓는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구원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고,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예수 안에서 완성되는 것을 우리는 그 속에서 보게 된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NIV>
(마 5: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발표만으로는 굳이 뉴스라 할 것도 없다. 거의 모든 세기의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나 신들의 존재를 믿었다. 사실 고금을 통틀어 인류 전체는 의식주, 쾌락, 일, 가정 할 것 없이 다른 모든 관심사를 다 합한 것보다도 신이라는 문제에 더 많은 주의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여기 계시고, 우리 편이시며,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필요한 쪽으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신다. 이것이야말로 뉴스감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한 만큼이나 그 주제를 둘러싼 어림짐작과 뜬소문도 엄청나게 많고, 그 결과 미신과 불안과 착취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마가는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과 부활, 곧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계새해 주는 사건들을 통해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서둘러 말해준다.
우리가 망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열심이시라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문제이기, 마가는 우리가 그것을 모른 채 소중한 인생을 단 일 분이라도 허비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값싼 은혜에 대해 말한다.
“값싼 은혜란 회개를 요구하지 않고 용서에 대해 설교하는 것, 교회의 훈련이 없는 세례, 신앙 고백이 없는 성찬식, 개인적인 죄의 고백이 없는 죄 사함이다. 값싼 은혜란 제자도 가 없는 은혜, 십자가가 없는 은혜, 살아 계시고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이다.”
그리스도가 선물로 주신 생명은 죽음의 대가였다. 이 새로운 삶은 쉽게, 혹은 값싸게 유지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충성과 신뢰, 겸손과 고백으로 반응하고 우리 삶 전부를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항복할 때 가능하다.
(롬 6:1-2)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알베르 카뮈의 희곡 『오해』에는 외진 마을 조금반 여인숙을 운영하며 근근이 사는 모녀가 나온다. 원래 그집에는 ‘장’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그는 어렸을 때 가출했다.
어느날 혼자 여행하는 손님이 들었는데 돈푼깨가 있어 보였다. 모녀는 망설이다 그에게 수면제를 먹고 돈을 빼앗고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돈맛을 본 모녀는 그 후로도 같은 짓을 저질렀다.
어느날, 건장한 한 젊은이가 투숙했다. 성공한 부자처럼 보였다. 수면제를 먹인후 짐을 뒤지다 그의 신분증과 사진을 발견했다. 그는 다름아닌 어릴 때 가출한 ‘장’이었다. 장은 어머니와 누이를 놀래 주려고 몰래 혼 자 혼 것이었다. 그후 모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기들이 죽인 남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열하며 강물에 뛰어들고 말았다.
모녀는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 그 유일한 희망을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 참담한 비극이다. 카뮈는 고발한다. 행복을 기다리면서도 정작 탐욕에 빠져 스스로 자신의 행복을 짓밟아버리는 현대인의 비극을 말이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산다. 그 날을 희망한다. 그런데 그날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날은 아니다. 그날은 희극처럼 기쁜 날이 디ᅟᅩᆯ 수도 있고, 비극처럼 너무 슬픈 날이 될 수도 있다. 그날은 구원의 날이 될수도 있고, 심파느이 날ㅇ리 될 수 도 있다.
바울은 빛에 속한 사람들과 어둠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 빛의 자녀에게는 희망의 날이다. 어둠에 속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다.
(살전 5:5-6) 『[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주님, 오늘도 주님을 기다립니다. 어두운 세상이지만,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기다림의 불꽃을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어둠을 따라가지 않게 하시고, 다만 주님의 빛을 따라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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