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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2편





   최근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에서 접했던 암울한 소식은 어떤 것인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중에서 특별히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인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세상에는 온통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들은 자기과시로 떠들썩하며, 부자들은 재산을 배경 삼아 거들먹거린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가 위협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권력자와 군대 그리고 백만장자 앞에서 기도가 무슨 쓸모가 있다는 말인가? 만일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다면 기도는 아무 쓸모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신다면 기도는 하나도 버려지지 않는다.


  (유진피터슨 시편-마음의기도’ IVP 성경공부 시편1편)


   기도없는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는 세상이다. 국가지도층과 재계 실력자들이 확고한 권력을 틀어쥔 요지부동한 상황에서 기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유진피터슨. ‘응답하는 기도IVP, p.37) 


 

말씀

 

시편 1편과 마찬가지로 시편 2편 역시 기도의 전 단계, 즉 기도로 방향을 전환하는 준비 단계다. 이 시편은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을 위해서도 기도하도록 준비시킨다. 하나님은 개인적 영역 못지 않게 공적인 영역에서도 일하신다. 따라서 개인적 기도만큼이나 공적인 기도도 필요하다.

 

 

허사를 꾸미는 세상 지도자들

 

시편 1편의 행동을 지배하는 묵상하다는 동사는 시편 2편에서도 사용되지만, 거기서는 문맥상 경영하다로 번역된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꾸미는고)?”

시편 1편의 묵상하다2편의 경영하다는 같은 동사이다. 이 두 가지는 같은 행동,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입으로 중얼거리고, 흡수하고, 반추하며, 이것이 중요한 말 즉 모든 존재를 결정하는 말임을 깨닫는 행동이다.

1편은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받는 태도지만, 2편에 이 말에 대해서 민족들이 대항하고 거스리며 경영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말씀을 진리로 그들의 삶을 꿰뚫는 창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슬로 본 것이다.


시편 1편에 나왔던 그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맨 것으로 결박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우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박으로 느껴진다면 우리 자신을 회개해야 한다.

운전을 하는 사람에게 자꾸만 신호등이 나온다. ‘~이거 너무 귀찮게 나오네, 그냥 가버려야하지하지만, 신호등은 자신과 타인의 안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칼빈이 말한대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그 증거중 하나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할 수 없고, 그 법을 구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에 반항한다. ‘그것을 깨뜨리자, 부수자이것이 우리 시대의 징후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껄끄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 세상 지도자들이 허황하게 시도하는 일들은 무엇인가?(2-3)

 

나서며,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준다. 그들은 다수이다(이방나라, 열방)이고, 유력하다(세상의 군왕들, 관원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한다. 그들은 그 말씀만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들의 거부를 세상 권력으로 발전시킨다.

이 사람들의 세상 군대의 대부분을 지휘하고 과학발전을 이끌며, 학교 제도를 운영하고, 정부를 통괄하고, 재계를 지배한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적극적인 음모를 꾸민하면, 도대체 기도는 무슨 소용인가?

지구를 흔들고 움직이는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여 연합하는 마당에 그저 순진하게 나무나 묵상하고 있다면 무슨 승산이 있겠는가? ‘위협산만함만큼이나 기도에 치명적이다. 우리가 위협에 굴복해 버린다며, 모든 문화, 정계, 재계, 과학계를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볼 단어가 이방나라들이 분노한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아라비아 숫자로 ‘2’라고 해 놓고 분노를 다른 말로 번역하며 소란이라고 했다. 이것은 본래 파도나 불길이 막 들끓고 있는 모습을 가리킨다.

조용하지 못한 세상, 소란하기 그지없는 세상, 마구 끓어 오고 폭발하는 세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분노하고 있는 세상, 소란한 세상이다. (이동원 시편강해 상()- 새벽사슴의 노래요단출판사, pp.11-13.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반역할뿐 아니라,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 기름부음자 바로 그리스도이다.

 

2. 하나님은 이런 시도에 어떻게 반응하시는가? (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크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가 참으로 크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왕자, 수상, 대통령, 신문과 텔레비전이 보다하는 세계보다, 핵 물리학자와 군사 역사가들이 쓴 두꺼운 책들에 묘사된 세계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는 이 크기를 경쟁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크심을 인식하는 길이 필요하다. 여기서 실패한다면 기도는 더 이상 자랄 수 없다. 우리는 웅크리고 위축된 채 기도할 것이다. 우리는 기도는 처량한 하소연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2편은 메시아를 보여준다. 그분의 우리 개인의 영혼을 다루실 뿐 아니라 이 세상속에서 일하신다. 메시아는 하나님이 세속 사회로 침입하신 것이다.

나사렛 예수께서 메시아(기름부음 받은자)로 선포되었을때, 사람들은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6:42)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했다. 그러나 사실이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침투하셨다.

두 가지 점이 메시아적 상상력의 타당성을 확장시킨다.

 

(1) 하나님이 세상 권력을 비웃으시는 모습이다. 우리는 세상의 오만함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웃으신다. 우리도 그분과 함께 웃는다. 웃다보면 높은 체 하는 모든 것이 어리석은 태도로 보인다.

(2) 예배에 대한 호소이다.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경외할찌어다.’

우리가 진정 떨며 두려워해야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며, 그 분 앞에 우리는 예배할 때 세상의 것들에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질문한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음주 운전자가 통제력을 잃고 나를 향해 질주해 오는 것을 하나님이 강한 손을 펴시어 잡아채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려 수해가 걱정될 때 비를 그치게 해달라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치셔서 내리는 비를 그치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큰 병이 걸렸을대 우리는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나 그 기도로 인해 진행되던 병이 멈추는 일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럴때, 우리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 질문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셔서 스스로 인생을 살도록 허락하셨고, 세상에는 자연법칙을 두셔서 우주가 스스로 돌아가게 하셨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간의 삶과 우주의 운행에 강력한 손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이신론자(Deists)들이 믿었듯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분은 우주 저 편으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제 스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만 계실까?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삶과 우주의 운행에 지속적으로 개입하신다. 다만, ‘강한 손을 펼쳐서 개입하시기보다, 대부분 부드러운 손으로 활동하신다.

 

때로는 하나님이 강한 손을 펼치신다. 2천년전 유대 청년 사울, 그는 예수당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의 칙서를 들고 다메섹으로 향했다. 하나님은 강한 손을 펼쳐 그의 길을 막으셨다. 사울과 그 일행은 태양빛 보다 더 환한 빛을 보고 땅에 꼬꾸라진다. 주님의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음성 내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니라를 듣고 사울의 인생궤도는 바뀌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많은 경우 부드러운 손으로 일하시고 속삭이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긴가민가한 방법으로 활동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강한 손을 구하고 기적적 간섭을 구하는 사람에게 그분은 종종 귀먹은 듯, 침묵하시는 듯, 무능력한 듯 보인다. 그럴 때 우리는 질문한다. “기도가 무슨 소용인가?”

하지만, 여전히 기도는 소용이 있다. 기도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시며,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고, 들리지 않게 말씀하시고, 느껴지지 않게 만지시기 때문이다.

3:20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나도 그와 더불어 먹으리라.’

투정하는 아이가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 박혀있다. 문을 부수고라도 들어가고 싶다. 하지만, 지혜로운 해결책은 아니다. 힘을 쓰는 대신 인내하고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잠겨진 우리 마음 문을 건드리지도 않고도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능력을 억누르시고 우리가 스스로 마음 문을 열때까지 기다리신다. 마냥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두드리신다. 하나님은 좀처럼 서두르지 않으신다. 천둥 같은 목소리로 우리를 위압하거나, 문을 뚫고 침입해 들어오시는 경우는 별로 없다. 우리가 악행을 결심하고 달려간다 해도 쉽사리 우리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리지 않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는 전격적이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응답되지 않아도 계속 기도할 수 있고,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의 강한 손이 펼쳐지지 않았을지라도, 그 분의 부드러운 손이 움직이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그분의 강한 손이 움직여 병을 뿌리째 뽑힌다면 좋겠지만, 그분의 부드러운 손이 움직여 그 질병의 고통을 견뎌내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도와 주는 것도 선한 일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분의 부드러운 손을 느낄 수 있는 영적감각이 필요하다. 그분의 부드러운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필요하다. 아지랑이와 같은 그분의 임재를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필요하다.

구약의 어린 사무엘이 있다. 삼상3장에 기록되었다. 사무엘은 한나의 가슴 아픈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태어나 미라클 베이비이다. 한나는 젖을 떼자 사무엘을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다. 그는 밤낮으로 성전에서 지냈다. 그의 잠자리는 하나님의 궤를 모신 곳이었다.

사무엘에게 들린 그 음성은 천둥과 같지도, 사자의 포효와 같지도 않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노쇠한 엘리의 음성으로 착각할 만큼, 하나님은 속삭임으로 말씀하셨다. 때로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영혼의 귀에 말씀하신다.

 

작자미상의 시 사무엘의 귀를 주소서 (O, give me Samuel's ear)'


, 사무엘의 귀룰 주소서

, 주님

당신의 속삭이는 말씀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도록

살아있고 민첩한

열린 귀를 주소서,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주님께 우선 순종한

사무엘 처럼.

아멘

 

우리가 그런 영적 감각을 갖길 원한다면 우리의 영적 생활을 끌고가는 세 바퀴를 점검해야 한다.

(1) 개인영성생활이다. 매일매일 하나님과 나누는 깊은 교제가 있는가? 기도의 시간 묵상의 시간.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며 주님과 기도하는 은밀한 교제가 있는가? 너무 분주해서 또 지쳐서 주님과의 개인적 사귐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2) 공동체의 영적교제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삶을 나누며 신앙의 여정을 같이 걷는 것이다. 우리 사랑공동체가 그리고 조별 소그룹 모임이 이 경험의 현장이다.

(3) 공적예배이다. 구약시대로부터 성경은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한 지체임을 분명히 했다. 영감 깊은 공적 예배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우리 영혼의 눈을 밝아지고 마음의 귀는 예민해 진다. 우리에게 공적 예배는 소중하다.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경외할찌어다.’

 

 

이 세상에 그리스도에 대한 반역과 복음에 대한 반역은 언제나 있어왔고, 주님오실 때가 가까울 수록 그 정도를 더해 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반역이 성공한 적은 한번도 없다. 왜냐하면 하늘의 하나님이 웃고 계시지 때문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의 극치는 디오클레티안 로마황제가 등극했을때 극에 달했다. 기원후 245-313까지 통치했다. 모든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고, 모든 성경을 없애고, 모든 그리스도인 무리의 모임을 금지했다. 그리고 이제 기독교의 이름은 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말살되었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죽었고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의 국교를 기독교로 선포해 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짙어가는 어둠이 오히려 새벽에 맞닿아 있다. “이제 기독교는 영원히 이 땅에서 사라졌다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은 웃고 계셨다.

 

우리는 시2편을 묵상하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때로 주님의 강한 손을 경험하게 하소서.

때로 불꽃같은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소서.

때로 뇌성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하지만 더 자주

주님의 부드러운 손을 경험하게 하시고,

아지랑이 같은 주님의 임재를 보게 하시며,

주님의 속삭임을 듣게 하소서.

저의 영성의 바퀴에

바람을 넣어 주시고

기름을 칠해 주시어,

매일같이 신나게 달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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