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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 1편






 기도없는 세상은 재촉하고, 강요하고, 요구하는 세상이다. 우리 안팎의 목소리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이 사진도 보고, 이 머릿기사도 읽고, 이 호소도 듣고, 이 죄책감도 느끼고, 이 멋진 물건도 만져보라고 한다. 이렇게 고도로 자극적인 세계에서 충분한 과도기를 거치지 않고 조용히 기도에 집중하기란 너무 힘들다.

 

말씀

 우리는 기도 가운데 근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경이의 세계로 들어가려 한다. ‘자아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의 세계로 들어가기로 결단한다. 문제투성이인 세계를 벗어나 경이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 쉬운가? 우리는 근심과 자아문제들에 익숙해 있지만 경이와 하나님의 신비에 익숙하지 않다. 시편 1,2편이 기도로 가는 길을 닦아 준다. 특히, 시편 1편은 위협에서 벗어나 예배로 가는 길이다.

 

죄의 길

 

1. 이 시편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부류의 사람이 나타난다.

1-3절에는 복 있는 사람, 4-5절에는 악인들이 나온다.

이 복 있는 사람의 길은 악인들의 길과 죄의 길과 대조되고 있다.

 

2. 저자는 1절에서 죄의 발전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좇다Walk->서다Stand->앉다Sit

죄가 움직임에서 멈춤으로 마침내 안방을 차지한다. 죄의길을 한참 걷다보면 서게되고, 서다보면 주저 앉는 것이다.

Counsel->Way->자리Seat

악한 꾀가 계획되다가 실천되고 안주해버린다.

악인->죄인->오만한 자

악인은 히브리적으로 정의할 대, ‘표준이 없는 사람이다. Standard표준이 없는 사람. 왜 표준이 없는가? 하나님이 없기에 표준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가라마조프의 형제>에 나오는 한 주인공, 이반 카라마조프는 이런 독백을 한다. “만약 신이 계시지 않다면 나는 마음대로 할 수가 있을텐데..”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삶은 무한한 허무로 떨어지고 우리의 표준은 사라지고 만다.

죄인은 누구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이다. 죄는 명중시켜야할 어떤 목표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명중되지 못하고 빗나간 것이다(하말티아). 죄인은 목표를 빗나간 사람이다.

죄인보다 더 심한 사람이 오만한 사람인데, 한마디로 하나님을 거스리는 사람, 하나님께 반역하는 사람이다.

우발적 범죄가 상습적 범죄로 마침내 죄를 자랑하는 것으로 자라간다.

 

나무와 겨

 

3. 주의를 집중시키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하나는 나무이고 이것은 굳게 심겨진 이미지다. 또 하나는 이고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물가에 옮겨 심는 나무는 우리를 기도의 길에 서게 하는 이미지를 풍긴다.

이 시가 시편의 기도책으로 만들어질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었다. 바벨론은 평평하고 별다른 특징이 없는 지역이다. 강 하나가 유일하게 흐르고 있었다. 바벨론사람들은 전역에 걸쳐 관개수로를 파서 땅의 생산성을 높였다. 이 지역에 옮겨진 이스라엘 사람들 무자비한 태양아래 있는 피난민들은 자신들이 기도하기에 최악의 조건에 있다고 생각했다.

화려했던 솔로몬의 성전은 예루살렘 폐허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도저히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중 한 사람이 바벨론 블루스같은 노래를 지었다. 모든 사람이 그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137:4)” 그들은 노래할 형편이 아니다. 그러나 노래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가?

포로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다시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분의 말씀이 그들에게서 응답을 끌어내게 함으로써 가능했다. 그들의 하나님의 말씀 토라를 묵상했고, 그들이 미처 알기도 전에 그들은 기도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무였다. 바벨론으로 옮겨심긴 그들은 뿌리를 내리고 잎을 내고, 열매를 맺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보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기도하는 것은 나무를 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추상적인 것은 기도의 적이다. 아름다운 개념들도 기도의 적이다. 세련된 사고도 기도의 적이다. 바위에 발가락이 부딪히고, 폭풍우에 흠뻑 젖고, 원수에게서 뺨을 맞을 때 진정한 기도가 시작된다.

옮겨심긴 나무는 기도하기 알맞은 조건을 정신없이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지금 여기에 기도하라고 한다. 나무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뿌리를 내려라.”

반면, ‘의 이미지는 어떠한가? 의인과 악인이 대조를 이루듯, 나무와 겨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무는 흔들림 없지만 겨는 산만하게 흩어진다. 곡식을 타작하면 쓸모없는 부분은 알곡과 분리시킨다. 키질을 통해서 알곡과 겨를 공중에 내던진다. 바람이 불면 겨는 가볍기에 날아가 버리고, 무거운 알곡만 다시 땅으로 떨어진다.

요즘,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 나무인가? 겨인가? 만일 나무가 되려면 당신 삶에 어떤 변화가 필요하겠는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묵상과 기도

 

4.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어떻게 대하는가?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묵상은 말씀을 단순히 읽거나 생각하거나 의미를 밝혀내는 지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다시 소리내어 읽으면서 말씀을 듣고 또 들어 그 소리들이 근육과 뼈 속깊은 곳 까지 파고들게 하는 생기적인 과정이다. ‘묵상은 씹는 행위이다.

묵상은 동양적인 명상과 전혀 다르다. 히브리어에서 묵상은 마구 소리지르는 것이다. 유대인 회당에서는 마치 우리 옛날 서당에서 책을 읽듯이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러 가면서 읽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책꽂이에 꽂혔다가 필요할 때 꺼내보는 백과사전이 아니다. 그 말씀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말씀이며 우리를 구원한다. 그 말씀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우리에게 명중한다.

삶이 분주하지만, 그 속에서도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 아닌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하며 넘치는 묵상 중에 기도하는 자가 되도록 결단하다.

(119:9-16) [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10]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단테의 신곡(神曲)은 어느날 갑자기 돌아본 너무나 잘못 살아온 삶에 대한 통한의 아픔에서 시작된다.


내 인생의 나그네길 절반, 반 이상의 고비에 올바른 길을 벗어나 살아왔던 내가 갑자기 한 순간 눈을 떴을 때에 나는 캄캄한 숲 가운데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숲 속에서 내 마음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골짜기가 다다른 저 언덕의 능선에 하나의 작은 길이 보였다. 새벽빛에 싸여있는 환한 길이었다. , 그 길은 축복의 길이었다. - 단테의 신곡첫머리 글


이렇게 인생 끝나는가 싶을 때, 갑자기 내 눈앞에 보여지는 작은 길, 새벽빛 같은 환한 길이 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주께서 허락하신 길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 악인들과 어울리다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등진 삶을 살 것인가?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삶을 살 것인가?



주약교회

2018  11월 첫째주 수요기도회

김광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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