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개정개역 | the MSG |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 1-2 무리의 환호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그 대 한 나병환자가 다가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주님, 원하시면 제 몸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3-4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그 즉시 나병의 모든 증상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온 동네에 말하고 다니지 마라.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의 표시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나은 몸을 조용히 보여라. 네 말이 아니라, 깨끗해져서 감사하는 네 삶이 내가 한 일을 증거 할 것이다.” |
● 전문맥
5장부터 7장까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올 때,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 8복 부터 이다. 산상수훈의 말씀. 무리들이 그 가르치시는 것에 놀람.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권세 있는 말씀에 감탄했다.
● 후문맥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여기서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 간구한다. 백부장은 군사적 치안을 담당한 로마군대의 지휘관이다. 그런 그가 예수께 나아온 것이다.
그리고, 간구한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주께서는 그의 요청에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동행하신다. 그가 정복자 로마의 백부장이라 해도 개의치 않으셨다. 당시 유대인들은, 건강한 사람과 문둥병자를 구별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했지만, 주님은 주님께 나아오는 그 누구에게도 차별을 두지 아니하신 것이다.
1.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때 허다한 무리가 예수를 좇았다.
하지만, 여기 한 사람의 기사가 소개된다.
그는 바로 한 문둥병자였다. 그에게는 이름도 없었고, 그를 나타낼 직업도 직책도 없었다. 그는 단지 부정하다고 추방당한 문둥병자였다. 원래 그렇지 않았다.그도 이름이 있고, 직업도 가족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문둥병자일 뿐이다.
문둥병자의 피부는 심하게 곯아있었고, 그의 얼굴이나 손발은 흉하게 일그러졌을 것이다. 문둥병자는 스스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고, 다른 이들과 함께 예배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마을에서도 살수 없었다.
그런 그가 감히 겁 없이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찾아와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고쳐달라고 적극적으로 간청하지도 못한다. 단지 주님의 원하심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가난할 대로 가난해져 있다.
2.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에게 예수님은 손을 내미셨다. 그분은 아무도 손대지 않고, 대화조차 꺼리는 문둥병자에게 자신의 따스한 손을 내미셨다. 그리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선언하신다.
잠깐 여러분의 손을 한번 보기 바랍니다. 손등에서 손바닥에서. 손가락도 눈여겨보십시오. 그리고 손가락 마디 마디 매만져보십시오. 감각이 느껴집니까? 누군가 여러분의 손에 대해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다면 어떻게 될까? 제작자가 당신의 사연을 소개하되 당신의 손의 일생을 바탕으로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는 갓난아이의 꼭 뀐 주먹으로 시작될 것이다. 이어 엄마의 손가락을 붙들고 있는 조그마한 손이 클로즈업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걸음마를 배우느라 의자를 붙잡는 손? 혼자 먹는 법을 배우느라 숟가락을 놀리는 손? 그리 오래지 않아 우리는 당신의 손에 애정이 담긴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아빠의 얼굴을 어루만지거나 강아지를 토닥여 주는 손.
역시 오래지 않아 당신의 손이 공격의 도구가 되는 모습도 보게 될 것입니다.
형을 밀치거나 장난감을 홱 잡아 뺏는 손.
우리 모두는 손의 용도가 생존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습니다. 손은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입니다. 똑같은 손으로 내뻗을 수도 있고 움켜쥘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받쳐 올릴 수도 있고 밀쳐 내릴 수도 있습니다. 선물을 건네주고 상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상처를 싸매주고, 식사를 차려주고 가지런히 기도하던 손,
남에게 손가락질 하며 주먹을 휘두르던 손. 주기보다는 받는데, 베풀기보다는 요구하는데. 사랑하기보다는 상처 주는데 익숙하던 손. 맥스루케이도 목사님의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상상력을 함께 나눠보길 원한다.
지난 몇 년간 아무도 내게 손을 댄 사람이 없었다. 단 한 사람도 내 아내도 내 자신도 친구들도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보았다. 내게 말도 했다. 나는 그들의 말소리에 사랑을 느꼈다. 그들의 눈빛에서 관심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촉감은 느낄 수 없었다. 손길이 닿은 일이 전혀 없었다. 단 한 차례도, 아무도 네게 손을 대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흔해 빠진 일들을 나는 턱없이 탐냈다. 악수, 따뜻한 포옹, 어깨를 툭 쳐서 날 불러주는 것, 마음을 훔치는 입맞춤, 나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린 순간들이었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아무도 내 몸에 부딪치는 일도 없었다. 무리 속에 섞여 들여 몸을 부딪치며 어깨를 부벼 댈 수 만 있다면 이 세상 어떤 일도 다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꼬박 몇 년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나는 거리에 나다녀서는 안 되었다. 랍비들조차도 나에게 거리를 두었다. 나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도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 나는 그야말로 접촉해서는 안 될 대상이었다. 문둥병자였다. 아무도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까지. 제사장은 나를 만지지 않았다. 그는 천으로 둘둘 말린 내 손을 쳐다보았다. 슬픔에 잠겨있는 내 얼굴을 보았다. 그날 들은 말에 대해 그를 탓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는 그저 규정대로 하고 있었을 뿐이다.
제사장은 입을 가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하여 손을 내민 뒤 나에게 말했다 “ 부정하다” 그 한 마디 선언으로 나는 가족과 농장과 미래와 친구를 잃었다.
아내는 옷 보따리와 빵과 동전을 들고 성문으로 나를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말이 없었습니다. 친구들도 모였습니다. 그들의 눈 속에서 내가 본 것은 그 뒤로 모든 이들의 눈 속에서 본 것의 전조와 같았다.
두려움 반 연민 반의 그 눈빛, 내가 다가서자 그들은 물러섰다. 내 병에 대한 두려움이 내 마음에 대한 연민보다 컸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고 이후로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은 뒷걸음을 쳤다. 병자를 격리시키는 것은 고대 중동의 문화만은 아니다. 격리 거주지를 만들거나 병자 앞에서 입을 가리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 역시 분명히 벽을 쌓고 눈을 돌린다. 거창하게 문둥병이 있어야만 따돌림을 받는 것도 아니다. 이혼한 사람은 이 기분을 안다. 장애인들도 안다. 실직자들도 겪어 보았고 못 배운 이들도 당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미혼모를 피한다. 우리는 우울한 이들을 경원시하고 불치병 환자를 외면한다. 이민자 타운, 노인 요양소, 저능아 학교, 중독자 센터 범죄자 감옥이 따로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순히 이 모든 것을 피하려 한다. 지금도 아픈 기억에 사로잡혀 조용히 외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이들은 다시 상처를 받느니 차라리 아예 접촉을 피하는 쪽을 택한다. 아, 나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얼마나 싫었던가? 문둥병 수년에 양손이 뭉툭해졌다. 손가락 끝이 덜어져 나갔고 한쪽 귀와 코도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나를 보면 아버지들은 자식들을 붙들었다. 어머니들은 얼굴을 가렸다. 아이들은 손가락질하며 쳐다보았다. 문드러진 상처는 몸에 걸친 누더기로 가릴 수 없었다. 눈 속의 분노 또한 얼굴을 두른 수건으로 가릴 수 없었다. 아예 분노를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말없는 하늘에 흉측해진 주먹을 휘두르며 하소연 하던 밤이 얼마나 많았던가?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래야 합니까? 그러나 한 번도 대답은 없었다. 몇 주전 감히 우리 동네까지 걸어가 보았다. 동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우리 밭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우리 집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다 나는 그 분을 보았다. 그리고 그분을 보는 순간 나는 변했다. 돌 뒤에서 나는 그분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나는 그분이 몇 발자국 사이로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갔다. 그냥 그대로 그 분 앞에 엎드려져 무릎을 꿇고 외쳤다.
“주여!”
그분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여남은 명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았다. 두려움의 물결이 무리를 훑고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팔이 얼굴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부모 뒤로 숨었다. “부정하다!” 누군가 소리쳤다. 나는 그들을 욕하지 않는다. 내 모습은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겁에 질린 그런 모습은 수천 번도 더 본 것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긍휼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가 뒷걸음질 쳤지만 그분만은 아니었다. 그분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그분이 말 한마디로 나를 깨끗하게 하셨다 해도 나는 감격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이 기도로 나를 깨끗게 하셨다 해도 나는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나에게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분은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나에게 손을 댔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밭고랑으로 물이 흐르듯 내 몸에 기운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마비됐던 부위가 온기가 느껴졌다. 말라비틀어진 부위에 힘이 느껴졌다. 구부렸던 등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그분의 허리께 머물던 내 눈으로 이제 그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미소 띤 얼굴을. 그분은 손을 오므려 내 귓전에 댄 뒤 바짝 곁으로 다가왔다. 어찌나 가깝던지 그분의 따뜻한 호흡과 젖은 눈빛을 그대로 느끼고 불 수 있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그래서 나는 지금 거기 가고 있는 중이다. 가서 제사장에게 내 몸을 보이고 그를 끌어안을 참이다. 아내에게 내 몸을 보이고 아내를 끌어안을 것이다. 딸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끌어안아 줄 것이다.
그분은 말 한마디로도 나를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한 치료 이상의 것을 나에게 주기 원했다. 나를 존중하고 내 가치를 인정하며 네게 신앙을 주기 원했다. 생각해보라... 사람도 손대지 않던 무가치한 자가 하나님의 만지심을 입는 존귀한 자가 되었으니....
왜 예수님은 그를 만지셨으며 정결하심을 선언하시는 것일까? 산상수훈의 능력있는 말씀을 증거하는 자신의 영적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서인가?
우리는 주님이 자신을 위해 그에게 능력 베푼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주님의 선언과 동시에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지자. 주님은 경고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주님은 이일로 자신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이런 이적을 행하신 것인가?
마가는 이 사건을 막1장 40절 이하에 기록했다. 그리고, 주님의 동기를 분명히 밝힌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셨다
‘민망히 여긴다’는 단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스플랑크논’(창자)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
주님은 창자가 내장이 고통을 느끼실 정도로 당신께 찾아온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이시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아프셨다.
우리 또한 죄와 허물로 인해 하나님의 거룩함에 근접할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그러한 우리에게 가까이 오사 손을 대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신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민망히 여기사 능력을 베푸시는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의 창자는 고통 하는 자들의 탄식소리로 인해 고통을 느끼시고 계신 것이다.
시 읽기 – 내게 너무 바보같은 당신
내가 상처로 혼자 울 때
당신은 내 곁에서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당신을 수없이 회의할 때
당신은 나만을 굳게 확신하였습니다
내가 혼자서도 설수 있다며
고집부릴때
당신은
쓰러지는 내 몸 밑에
먼저 엎드렸습니다
당신이 부를때
난 듣지 않았고
당신이 손내밀때
필요없다고 뿌리쳤고
당신이 한발짝 다가오면
난 열걸음 달아났건만
바보같은 당신은 단 한순간을
날 미워할 줄 몰랐었지요
내가 당신을
수없이 원망하여도
당신 눈동자엔
눈물만이 깊어질뿐
내가 당신을 향해 비수를 빼들어도
당신은 나를 향해 환한 팔을 벌렸습니다
내가 나의 모습에
독한 절망을 들이킬 때
당신은 나를 보고
세상의 빛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나를 포기하여 주저앉을 때에라도
당신은
나를 향한 소망을 버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늘
당신에게서 벗어나려 하지만
당신은 나를 묶어둔 적이
결코 없습니다
습관처럼 배반을 되풀이하는 나를
당신은 눈동자처럼 지켜주셨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너무나 영악하게 굴었지만
당신은 나에게 늘
바보같기만 하였습니다
이토록 당신이
내게로 오지 아니하였다면
난 바알의 포로,
어둠의 이름으로 살았겠지요
핏빛 사랑 고백으로
바보처럼 오신
그 때 나는 당신의 연인,
빛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옥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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