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디모데후서 강해

디모데후서 1장 9-18절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낭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카프카 변신’, 저자의 말 중에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서, 영적 어둠 잠에서 깨워나지 못하고 도리어 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의 삶을 순환시키는 것이라면,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

 

소크라테스도 스스로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테네라는 혈통 좋은 살찐 말을 깨우는 등에이고자 했다. 등에는 말이 잠들지 못하게 자꾸만 물어뜯고 귀찮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이 제 잘난 생각에 독단의 잠에 빠져 타락하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가지 않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며 무지를 깨우치려고 했다.

 

바울은 찬양시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힌다(9-10절), 이어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복음을 위해 일하는지 알려주고, 또 자신이 누구를 신뢰하고 있는지 고백한다(11-12절). 그러면서 디모데에게도 바른 교훈을 본받으며 자신이 부탁한 것을 준수하라고 요청한다(13-14절). 말미에 바울은 자신이 로마 옥중에 있을 때 부지런히 방문했던 오네시보로를 회상한다(15-18절)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자고 디모데를 초청한다. 그것은 우리로 되묻게한다. 우린 과연 복음을 위한 고난 받음이 있는가? 그것이 없다면 종교는 아편이라고 한 말처럼, 우리를 잠들게 하는 것이 되고 있지 않는가?

우린 과연 이 땅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각오가 되어져 있는가? 그 고난은 어떤 유익이 있는 것인가?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3:8)

 

코로나에다 도쿄 올림픽이 연기되면서 올해 치러지게 되었는데, 별 관심없이 지낸다. 그런데 한 소식에 귀가 솔깃해진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안겨준 김제덕 선수. 초등학교 3학년부터 양궁을 시작해 중학교시절 전국 대회를 휩쓸어 양궁 신동.

이번 대회에 참가한 한국 양궁 국가대표팀을 통틀어서도, 또 역대 우리나라 양궁 대표팀으로서도 최연소 금메달리스트로 기록되게 됐다.

하지만, 김 선수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지난 2019년 국가대표 2차 선발전에 나서 114위를 기록해 2차에서 최소 20위 안에 드는 걸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어깨 부상으로 대회를 중도에 포기했다. 이날 김 선수의 부상은 어깨충돌증후군이었다.

어깨충돌증후군은 지나치게 많은 반복 숙달 훈련으로 어깨 관절끼리 부딪쳐 염증이 생긴 것으로 연습 벌래 김 선수에게 닥쳐온 가장 큰 시련이었지만 김 선수는 포기하지 않고 재활에 나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코로나19로 인해 올림픽이 미뤄지면서 기회가 다시 한 번 더 찾아와 3차에 걸친 선발전과 평가전 끝에 올림픽 출전이 확정됐고 역사상 처음으로 선보인 양궁남녀혼선 단체전에서 첫 금메달을 안기며 코로나19 시름에 빠져있는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우리의 경건의 훈련, 복음에의 삶은 금생과 내생에 유익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때, 그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그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결코 아니라고 하였다. 복음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보여주는 초대이다.

 

영성이란 무엇일까? 가치를 제대로 분별하는 눈이다. 5살 꼬마에게 1000만원짜리 수표와 아이스크림 큰 것 한통을 주고 하나만 선택하라고 하면, 무엇을 선택할까? 당장에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안을 것이다. 하지만, 안목이 자라나면 선택도 달라진다.

마치 보화를 발견한 한 농부가 자신의 가산을 다 팔아 그것을 산 것처럼, 천국은 그런 것이다. 누가 그것을 희생이요 허비요 낭비라 하겠는가? 한 여인과 결혼하고자 돈쓰고 시간쓰고 아낌없이 다 나눈다면 그것이 희생이겠는가? 가장 좋은 것을 얻기위해 나머지것을 기꺼이 버리는 것이다.

 

1. 찬양시(9-10) : 하나님의 복음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영적 관점에서 가치를 말해준다.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바울사도가 말한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주신 은혜를 따라우리를 거룩한 구원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권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사라는 중심적인 증언으로 시작되는 복음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주어진 구원이다.

바울은 그의 최초의 서신인 갈라디아서에서 말했듯, 그의 마지막 서신서인 디모데후서에서도 동일한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 구원은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동시에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다시 말해 거룩해 지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 장로 권사 집사 그 다음이 아무나 성도인가? 우리는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성도는 직분이 아니라, 신분의 차이이다. 우리에게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어린아이의 젖 먹는 수준에 머물러서 장성한 자의 단단한 음식을 먹는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분의 형상에까지 거룩한 모습으로 자라가도록 부르셨다.

우리는 과연 신앙인의 수준을 하향조정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최소한 경건생활과 혹은 봉사와 전도에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직분자의 자리에 서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사람 가운데는 주일날 교회에 가는 사람정도로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존재이고, 악인의 길을 따르는 자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값진 복음을 값싼 복음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현대의 교회들인 것 같다.

 

마치 다 같은 로랙스 시계라도 백화점 진열대에 조명아래 유리관에 진열된 것과 지하철역 귀퉁이 싸두려 판에 두어진 것과는 품격이 다를 것이다.

우리는 이 귀한 생명의 약속이 있는 복음을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로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가? ‘구원은 참으로 웅대한 단어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죄에게 구원하신 이 사건은 천사가 보고서 흠모할만한 사건이다.

너무나 값진 것이기에 값없이 그저 주셨다.

 

 

이 구원은 어디에서 생기는 것인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9).

그것은 영원한 때 전부터 세상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 당신을 향한 계획 있었죠

 

내용은 바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독교 이외의 다른 종교는 인간의 공로를 말한다. 자기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스스로의 고행을 통해 죄를 벗어던지고 구원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이다. 불교는 공덕에 의해 수행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며 머리 깍고 절에 들어간다. 유대교는 신약을 인정치 않고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율법적인 하나님으로만 오해하여 그리스도예수를 통해 제시하신 길을 거부한다. 카톨릭은 선행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길을 열어 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의 공로는 없다. 40일 금식 3번쯤하고 헌금도 10억쯤 해야 구원을 얻고 죄를 사한다면, 우리 중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급류에 빠진 사람에게 구원의 길은 밧줄이 던져지는 것이며 그것을 잡는 것뿐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둠가운데 있기에 그분에게서 던져진 예수님이라는 밧줄을 붙듦으로서만 구원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10절을 읽어보자.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우리 인생은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해야 하는’(2:15) 존재였다. 사망의 권세를 피해 가는 것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사망이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것일 따름이다. 이 사망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가 없다.

생명과 사망, 사망의 폐기와 생명의 계시에 관해 확신 있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스스로 임박한 죽음의 예상에 직면한 사람이다. 그는 사형 집행을 받을 날을 예견하고 있다. 벌써 그의 상상 속에서 사형 집행인이 휘두르는 칼의 섬광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죽음의 면전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사망을 폐하셨다라고 크게 외칠 수 있는 것이다.

 

2. 바울의 사역과 신앙의 대상(11-12) :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의무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는다고 이야기 하는데 왜 이 복음에 관해 인간들이 증오하고 배척하며 복음 전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이다(9). 넌크리스챤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어 완전히 무능력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로 인해 죄속함에 대한 하나뿐인 구원의 길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복음은 바로 인간이 죄로 인해 철저히 가망 없고 죽은 존재라는 것,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받는 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직 뭔가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다.

 

 

3. 디모데에 대한 요청(13-14)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13).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고 두 번이나 강조해서 말한다.

복음은 바로 바른 말이며 부탁한 아름다운 것이다.

바른말은 건축가 건축하기 위해 흙더미를 뒤집고 뼈대를 세우고 미장공사를 하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작성되는 설계도와 같다. 그 건물이 제대로 건축되는지는 이 설계도에 의해 비교되고 검증되는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한쪽 귀로 듣고 흘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따라야 할 것이며, 단단히 꽉 잡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그것을 실행해야 할 것이다.

 

디모데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헬라어 동사 휠라소도둑들에게서 궁전을 지키는 파숫꾼이 경계근무를 서면서 보물을 지킨다(11:21)의미로서 사용된 단어이다. 복음을 부패시키고 교회에 맡겨진 고귀한 보물을 교회에서 강탈하려고 혈안이 된 이단들이 사방팔방에 널려있는 것이다. 그들은 호시탐탐 우리가 가진 보물을 노리고 있다.

 

4. 오네시보로에 대한 회상(15-18)

 

그는 아주 야무지게 복음을 지켜야 한다. 디모데가 있는 에베소와 그 주위 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바울이 수년 동안 사역했던 아시아의 교회들은 바울을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으나, 그가 체포되었다는 사건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는 대의명분을 부셔놓았다.

 

누가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주의 말씀을 들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19:10)말한다. 그런데 이제는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바울을 외면하고 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예외인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바로 오네시보로이다. ‘저가 나를 자주 유쾌하게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며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이 사실은 오네시보로가 바울이 체포되었을 때도 그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를 수행하여 로마까지 따라갔고, 바울이 갇혀있는 지하 감옥에서 그를 발견할 때까지 그를 부지런히 찾아다녔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어쨌던 아시아에 잇는 모든 사람이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 이외에는 바울 사도를 외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빼앗기지 말고 지키라는 것이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이 부모님을 섬기는 것처럼 절대적 순종의 성격을 지니기보다 페스트푸드점의 음식을 먹듯이 입맛대로 신앙생활하며 을 주는 곳에 쫓아다니지만, ‘고난을 말하는 곳은 피해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바울은 연약한 디모데와 우리에게 그렇다면 어떻게 확고히 견딜 수 있는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

복음의 보물은 스스로는 지킬 수 없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만 지켜질 수 있다. 12절의 말씀처럼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하기때문이다. ‘나의 의탁한 것은 주님께서 내게 맡기셨던 복음이다. 의탁한 것을 나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자신에게 맡기셨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복음의 보증인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는 그의 보물을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에 담으셨다. 연약하고 실족하기 쉬운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이것을 의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복음의 최종적 수호자시이며 자신의 교회에 맡기신 진리를 보호하실 것을 믿고 확신하며 복음을 지키는 일에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첫 번째 의무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할 것이다. 진정한 복음은 결코 인기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아주 심하게 죄인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놓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고난 받도록 부름 받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보기 좋게 꾸미려고 하고, 감수성이 강한 현대인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들을 말하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을 지키고 그 순수성을 보존해야한다. 복음을 신실하게 지켜 전파하고 그것을 위해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다.

 

결론

 

우리가 간직한 보물의 값어치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돼지에게 던져진 진주처럼 값싼 복음으로 짓밟혀지고 있지는 않는가? 사단은 이 복음의 가치를 알고 잇기에 이 복음에 대해 유사상품 짜가를 만들어 낸다. 우리를 현혹한다. 값진 것일수록 짜가가 많다. 가짜에 속지 말고 우리 안에 심겨진 복음의 큰 비밀을 소중히 간직한 자가 되자. 아름다운 것을 힘써지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