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배경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여러달에 걸쳐 천천히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그곳에 도착하면 무언가 완전히 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기 수도에서 30Km도 채 안되는 여리고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가히 기대감의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제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이제 며칠만 지나면 그 분은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거야. 그 날 로마의 압제자들의 표정이 어떻게 될 지 궁금하군. 이제 거의 다 되었어 ! ”
예수님은 수차례 그들의 흥분상태를 가라 앉히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이지, 정치적인 승리가 아니라고 반복해서 경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대한 비유를 이야기 하게 되신 것입니다.
주약교회 주일설교 김광영 목사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로 시작됩니다. 그 분은 먼저 먼 여행길을 떠나셔야만 하고, 다시 돌아오실 때 비로소 왕위에 앉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계시지 않는 기간 종들에게 한 가지 임무를 맡기십니다.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 그것은 종들의 충성심과 책임감을 시험해 보기 위한 것이며 종들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로 한 사람에 1므나씩 주고 있습니다. “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단지 누구말처럼 산이 있으니까 어쩔수 없이 올라가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분이 돌아오시기까지 그분의 돈을 가지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시간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을 가지고 그 분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달란트 비유를 알고 있습니다. 종들의 재능에 따라 다르게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므나 비유에서는 모두에게 균등하게 주어집니다. 달란트에 비해 1/60밖에 되지 않는 돈이 므나지만, 그래도 100드라크마 즉 노동자 3달치의 가치가 있는 돈을 종 10명에게 나누어 주는 주인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1므나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대학 총장님이라고 하루가 한 25시간쯤 됩니까? 대통령이라고 하루를 30시간쯤 삽니까?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24시간이라는 하루를 매일 선물받아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이 오시는 때를 준비하며 열심히 장사하여 이윤을 남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재능과 시간과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오실 그 분을 위해 투자합시다. 우리의 시간은 결코 무의미한 흐름이 아닙니다.
이러한 도전에 반응하는 (세가지 종류의 사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첫째, 자신을 반역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 그들의 반역의 뿌리는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비유의 맨 마지막에서 그분을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자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줍니다. “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 이 마지막 부분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주님의 왕됨을 인정치 않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착한종들이라고 불리우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 자신이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냥 방치해서 보관해두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머리를 굴리고 노력을 해서 한 사람은 1므나로 10므나를 또 다른 사람은 5므나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충성됨에 대해 주인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도는 얼마를 남겼느냐가 아니라 질적인 충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겠다. ”고 말씀하시며 10므나를 남긴 이에게는 열 고을을 5므나를 남긴 이에게는 다섯고을 맡기는 주인을 보게 됩니다.
종으로 장사하는 신분에서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의 신분으로 보상하시는 주님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그것에 충성할 때 그것을 맡기신 그분은 후히 주시는 주님입니다. 또한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10므나는 열 고을로 5므나는 다섯고을을 맡겨주십니다. 주님은 모두에게 24시간이라는 므나를 하루에 주셨고 인생이라는 기회를 단 한번씩 사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회계받고 판결받게 될 것입니다. 나의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것이 시험공부든 집안청소든 아니면 학원수강이든 예배참석이든 뭐든 간에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님을 위해 일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일한 만큼 보상해 주실 것이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골 3:18-4:1)
건축 노동판에 세 사람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 저요? 지금 바위를 깨고 있쟎소 ” “ 저는 제 아내와 아이들을 먹여살리려고 돈을 벌고 있지요 ” “ 아, 저요? 지금 대성당을 건축하고 있는 중이지요 ” 똑같은 일을 하지만 대답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영원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 시험공부중에 있는 여러분께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생각할 사람은 한 므나를 수건에 싸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사람입니다. 그의 주인의 성품에 대한 묘사는 터무니 없이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는 “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 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 그는 자기 주인이 무슨 이윤에만 눈이 멀어 노동자를 착취해 먹는 악덕 기업주인양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인은 열 명의 종들에게 상당한 분량의 돈을 맡겼는데 고대 시대에 종의 신분이 지금의 고용인의 신분에 채 못 미친다고 생각할 때 자신이 없는 동안 그들에게 알아서 사용하라고 한 것이 과연 부당합니까? 더구나 그가 그 돈을 맡긴 것은 10므나와 5므나를 남긴 사람에 대한 처우에서도 보았듯이 작은 일에 대한 충성심을 보고 큰 권세를 맡기고자 함이었음을 볼 때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종들과 함께 재산을 경영하려 했고 완전히 재산을 상속받게 되자 이제는 그것을 그 종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합니다.
이 종은 자신을 어떻게 보고 겨우 1므나를 맡겼는지 분개해서인지, 다른 종들이 자신보다 돈을 더 잘 사용해서 약이 올라있어서인지, 그는 결국 스스로 자기 주인의 넓고도 너그러운 마음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는 손수건에 돈을 싸 가지고 와서는 이렇게 변명하고 있습니다. “ 나는 당신이 두려웠습니다. ” 그는 사업에 성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어쩌면 원금마저 까먹을 수 있겠다는 불안감, 실패에 대한 염려 때문에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성과를 얻지 못할 경우 주인의 호된 책망이 두려워 아예 일할 엄두도 내지 못했고 또한 자신이 땀 흘려 일해 보았자 주인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서 1므나를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어느 여행자가 어느 한 작은 시골 마을에 이르러, 가던 길을 멈추고 농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 올해 벼 농사는 어떻습니까? ” “ 아무것도 없어 ” “ 아니, 하나도 안 심었단 말씀입니까? ” “ 안 심었지, 수해가 나서 다 쓸고 가버리면 허탕만 칠텐데 뭘 ” “ 그러면 옥수수 농사는 어떻습니까? ” “ 그것도 하나도 안 심었지, 벌레가 다 갉아 먹어 버리까봐 두려워서 원”
“ 감자는 어떻습니까 ” “ 그것도 없어, 병충해가 무서워서 ” “ 그렇다면 무엇을 심으셨지요? "
" 아무것도 안 심었지, 올해는 안전하게 탈없이 살고 싶어서지 ”
바로 이것이 세 번째 종이 살아가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안전이 제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위험한 발상이었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무서워 하던 주인의 진노를 피하려다가 훨씬 더 큰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주인은 그에게 “ 악한 종 ”이라고 야단치고는 “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그 종은 자신이 주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에 입각해서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문제는 주인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우습게 여긴데 있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두려워 했다면 자기의 받은 므나로 최소한 무엇인가를 했을 것입니다. 그저 은행에 예금해 두는 정도라도 말이죠. 그런데 그는 악한 종이었는지라 그저 자신의 게으름과 나태 무책임에 대한 변명거리만 찾고 있습니다.
그 돈을 은행에 예금이라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주인의 말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요? 그것은 주인이 무노동으로 이윤을 얻으려 했다면 은행의 이자를 취하는 것이 더 안전하고 실속있었겠다는 말입니다. 돈을 종들에게 맡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돈을 종들에게 맡긴 것은 주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기 보다 종들의 충성됨을 알아보고 그에대해 정당한 아니 더 풍족한 보상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주신 것들이 작다고 불평이 됩니까? 남들은 잘 사용하는데 나는 잘 못하는 것 같아 시기심이 생깁니까? 주님은 악한 종의 예를 통해 우리의 소인배같은 편협하고 나태한 마음 그리고 수동적 태도에 대하여 경계하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비젼과 열정을 가지고 그분의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실수를 한다 하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박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모험에는 위험이 따르리라는 것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충성됨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왜 그 사람의 므나를 이미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뺏기기 까지 해야하는가? 마태는 이것에 대해 기록하기를 “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 (마25:30) 고 말한다. 이 불충성한 종이 보여주는 아이러니는 모험을 피해보려 애쓰다가 그만 사실상 가장 큰 도박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영혼을 건 도박을 말입니다. 주인에게 받은 바 시간과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 보지도 않고 그것을 우습게 여기고 고의로 사장시키는 자는 모두 빼앗겨 살 가치조차 없는 존재가 되고마는 비참한 결말로, 주님은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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