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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18th 약속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여' _ 이사야 40장 6~9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7-8

 

Sun 6th Jan 19

  


  

 

C.S 루이스는 <헤아려본 슬품>에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이 정말 행복한 나머지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대, ‘아차, 이게 아니구나!’ 정신차리고 찬양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이 두 팔을 벌리고 반겨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절박하게 필요할 때, 다른 모든 도움들이 하나도 소용없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보라.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당신 눈앞에서 문이 닫힌다. 빗장을 지르는 소리 이중으로 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 뒤에 침묵이 흐른다.

.. 하나님이 우리가 번영할 때는 지휘관의 모습으로 분명히 나타나시면서 환난을 당할 때는 전혀 돕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가?

 

주 여호와의 기운이 꽃 위로 불 때 꽃이 시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회복이 아니라, 찬란하던 꽃에 죽음의 그림자가 깃드는 것일까?

이것은 꽃의 본성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기운이 불기 전부터 원래 꽃에게 존재했던 것이다.

 

개미지기(The Antkeeper)

정원사와 날아다니는 개미 2마리. 개미들은 정원사가 금한 곳으로 날아다닌다. 금지구역에서 개미들은 식충식물 위에 내려앉았다. 식물은 곧 입을 닫았고, 불쌍한 개미는 그 안에 갇혔다.

두 개미가 어떻게든 탈출해 보려고 버둥대는 사이, 정원 반대편에서 정원사가 이 소리를 들어 식충식물에게로 온다. 정원사는 개미들을 생각해서 이미 경고도 했었다. 식충식물 속에 갇혀 몸부림치는 개미들을 본 그는, 손으로 식물을 단단히 붙잡고 잠시 기다렸다.

정원사가 힘쎈 손으로 식물을 가차 없이 뭉개 버릴 것 같은 사이, 이 개미들은 죽어도 싸다는 생각에 온 몸이 오싹해진다.

그러나, 정원사는 개미를 죽이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레 식물의 입을 열고 개미를 꺼내 날개만 제거한다. 나중에는 정원사의 아들이 개미가 되어 개미 소굴에 들어가 자멸하려는 개미들을 구해 낸다.

 

성경은 긴장감을 보여준다. 시편 기자들은 두려움과 사랑의 하나님을 동시에 말한다.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하난미의 일하심에 두려움을 느낀다. 언약의 하나님을 향해 아낌없는 사랑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도바울도 죄에 속박된 자신의 모습에 괴로워하다가도(7), 그 누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진리에 기뻐 뛴다(8).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받아 마땅하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지 못하고는,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 도리가 없다. 죄를 깊이 깨닫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값싼 은혜를 만들어 버린다. 끝도 없는 절망과 최악의 타락 상황에 온전히 직면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두려운 마음으로 깨닫는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시로코라 한다. 예루살렘 근방에 거주하는 자들은 이 열풍이 불었다 하면 몇 분 사이에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의 무성한 풀들이 금세 죽어 버린다는사실을 안다.

인간이 풀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를 소생하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더욱 큰 기쁨과 경탄이 흘러나온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40:8

 

지금가지 목소리가 언급한 말씀에 정반대되는 내용이 갑자기 등장한다. 한줄이 빛이 찬란히 비추이는 느낌이다.

이 밝은 한 줄은 빛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설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마르거나 시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리라는 주장에 우리 인생을 걸 수 있겠는가?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과 안정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488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오셨다.

성탄 찬송처럼 이 슬픔 많은 세상에 참 위로 넘치니, 온 세상 사는 사람들 다 화답하여라

 

하나님의 말씀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했으며,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

 

2. 이 말씀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상로 사역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확실한 소망과 영원한 약속이 잇는데, 왜 굳이 마르는 환상과 시드는 말로 그들을 위로하려 드는가?

인간의 말은 그대로 이루리라는 보장이 없다. 순진한 인간의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려 할 때, 우리는 모든 육체가 풀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것이다. 인간의 말은 빈 수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정치인 후보의 허황된 공약이나 텔레비전 과장 광고에서 흔히본다.

심지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약속을 어기거나 자신이 말한 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인생이라는 비극이 그들의 좋은 의도를 막아 버린다.

 

이것과는 달리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부터 그 안에 그 말씀을 성취할 능력이 있다. 왜 말씀은 진실하고 실제적이며 의미있고 영원한가? 말씀이신 예수님이 진리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바로 진리이시며 그분이 쓰신 말씀에는 그 존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말씀을 성취하고자 그 말씀이 성육신하신 분이 여기 계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모든 육체는 풀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시들어 갈 인생을 사는 것은 고통스럽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 절규를 안다. 우리는 깨지고 시든 꿈을 지닌 이 세상의 슬픔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최후의 웃음을 보며 웃는다. 우리에게 절망을 이긴 승리에 대한 웃음이 있다.

낙심한 직장 동료에게,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영구한 소망을 제시할 수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었을 때, 육체는 풀이라는 현실에 슬퍼하지만 부활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웃을 수 있다.

연약한 친구들이 돌아서고, 세상의 공허한 약속이 우리를 실망시킬 때, 외로움의 절규는 예수님의 웃음과 대조를 이룬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설 것이다.

삶의 순간 순간마다, 우리는 풀과 시드는 꽃을 마주한다. 그러나, 이사야 40:8을 주 여호와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어서 높은 산으로 올라가거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힘껏 높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

유다의 성읍들에게

여기에 너희의 하나님이 계신다하고 말하여라.


이사야 40:9 새번역



우리가 외치는 좋은 소식의 핵심키워드는 무엇인가?

여기에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다.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다. 성령님의 소식이다. 파라클레이토스, 우리의 변호인이 되시며 상담가가 되시며,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소식이다.

저 천국만이 우리집은 아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다.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다 시 46:1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8:38-39

 

우리는 어떻게 외칠 것인가? 9절은 차근차근 그 과정을 설명해 준다.


1. 가장먼저, 계곡이나 교회가 아닌 높은 산 정상에 올라 탁 트인 곳에서 대담하게 선포하라.

 

여기서는 산 정상 Summit을 말한다. 여호와의 성소에 올라가는 순례자들처럼 우리도 높이 솟은 정상에 올라가야 한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는 공공장소에서 우리의 행위를 관찰한다. 서울 지하철에서 기타를 치고 찬양하며 전도하려 했다가 저지당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동네한 어귀에서, 학교에서, 식료품가게서, 병원에서, 역광장에서 더 좋은 소식을 찾는 사람들,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기준점을 찾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2. 목소리를 힘껏 외쳐야 한다.


힘껏 이라는 단어 with strength는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는 31절의 그 절정을 맞이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일단 높은 곳에 올라가, 메시지를 사방에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우리 속의 망설임 두려움에 단호히 말한다.

뭐가 문제냐? 당신이 지체하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가. 까짓것 던져버려

그 즉시, 우리가 전할 영광스러운 내용이 부정적인 비난을 삼켜 버린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3. 누구에게 외칠까?


시온과 예루살렘에게이다. 이지리적 명칭은 복음의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동네 친구 직장동료 가까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하나님을 들어야 할 자들이다.

교회에 온갖 전도프로그램과 집회가 일상에서 자연스런 복음전도가 되어야 함을 잊어버린 것 같다.

훌륭한 전도프로그램도 하나님을 말하는 방법에 도움이 되겠지만, 프로그램 만으로는 진정한 복음전도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기쁨에 찬 확신에 대한 자발적인 반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우리의 증거가 비롯된다.

 

최근 당신을 가장 흥분하게 만든 사건이나 소식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기 힘들었는가? 아마 입이 근질거려서 그냥 말이 툭 튀어나왔을 것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을 떠들어 대기는 참 쉽다.

하지만, 6-8절에서 보았듯 이 좋은 일들은 금세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영원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한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까봐. 아니면 요즘 10명중 2명밖에 복음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통계조사를 들먹이며 최근 일어난 대형교회 인기많은 목사들의 비리를 들출까봐. 복음을 전하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라서, 너무 바빠서, 나밖에 모른 사람이어사, 다른데 정신이 팔려있어서 염려한다.

이 선지자들의 담대함과, 초대교인들의 열정,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사방에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초신자들의 전염성이 우리에게 필요한다.

높은 산에서 소리치며 전하라는 말은 사통발달한 큰 거리에서 강단을 마련하고, tv나 대중매체로 마케팅전략이나 쇼 비즈니스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전할 소식이 너무 좋아서 입 다물고 있거나 혼자 중얼거리기 아깝다는 것이다. 우리하나님의 함께 계심 그 자비의 소식이 너무 좋아서 우리가 드러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다.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이 물동이를 던져놓고, 마을로 내려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만난 그분을 전하게 된다. 골짜기 밑에서 그들을 들어 올리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는 메시지를 들어야 할 사람에게 소개하는 특권을 부여 받았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마라톤의 전령사처럼 고대 로마 그리스에서는 승전보를 들고 온 사람은 높은 산에 올라 무조건 외쳤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가 목이 빠지게 기다린른 소식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할 메시지는 얼마나 좋은 소식인지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왜 이 세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의 주도권을 잡도록 내버려 두는가?

어째서 우리 문화가 우리를 복음에 당황하게 만들도록 내버려 두는가?

바울사도의 로마서 1:16처럼 우리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데, 우리가 전할 메시지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할지 안절부절할 필요가 없다.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고작해야 풀에 불과할 테니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사실을 그저 전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호와께서 여기 계심으로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남을 개종하거나 설득하는 것이 보냄받은 자의 책임이 아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이 받은 그 소식을 충성되게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슬픔 많은 세상한 복판에서, 풀과 같고 시드는 허망함과 무의함에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다.“여기에 너희 하나님이 계신다.” 우리는 선포할 것이고, 나머지 모두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다.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전하세, 큰 환난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내 작은 입으로 곧 증거하리니 성령이 오셨네.”



진주에서 김광영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