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편에서 즉각적으로 두드러진 점은 단순성이다. 이 몇 절로부터 예배가 겉치레라는 결론은 쉽게 내릴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노래임을 배우게 된다. 이 시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중 열 다섯 번째 노래로 마지막 노래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집과 그 안에서 섬기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향한 이 찬양의 노래는 예배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역에 늘 신실하도록 격려한다.
주님의 전에 머물다 한밤이 되어 떠나는 이들이 성전에 남아 밤에 전례를 거행하는 사제들과 주고받는 짧은 축복의 기도를 노래한다. 떠나는 이와 남는 이가 어떻게 서로를 섬겨야 할지 일깨워주며 축복하는 기도가 된다.
히브리 시인은 1절에서 주님의 집에 있는 이들이라 하였는데, 오경웅은 주님의 집을 지킨 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있다. 주님의 집을 주님의 집답게 한 것이 곧 주님의 집을 지킨 것이니 깨어 있는 믿음으로 주의 전에 머물렀음을 뜻한다.
_ 스티븐 J. 로슨. 『Main Idea로 푸는 시편 76-150』. 김진선 옮김. 디모데, 2008. 627쪽
옛날 성전에는 야간 근무를 하는 여호와의 종들이 있었다. 지금도 직장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종들과 다를 것이 없는 모습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에게는 이런 제사장들의 모습이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밤을 지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들을 축복한 노래가 이 시편이다.
밤은 안식의 시간이지만 동시에 어두움의 권세자가 활동하는 시간이다. 어두움의 영들이 밤에 기승을 부리고 많은 죄악의 역사가 밤에 쓰여진다. 사단은 밤을 지배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그의 부하들은 날개 짓을 하며 온 세상 어두운 골목들을 방문하여 어둠을 인위적인 빛으로 포장한다. 인생들은 이 미혹을 알지 못한 채 어둠에 빠져들어 간다.
그런데 이런 밤에 깨어 일어나 손을 들고 송축하는 사람들이 있다. 찬양과 기도로 밤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선포한다. 이 밤에 성령께서 모든 어두운 세상의 공간들을 참된 진리의 빛으로 비추시기를 간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어둔 밤 쾌락의 허무를 깨닫고 성전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은 밤을 기도로 지새우는 종들의 기도에 응답한다.
_오경웅. 『시편사색』. 송대선. 꽃자리, 2019. 719-720쪽
이 찬송은 예배를 드리는 신도들에게 찬송하기를 권하는 부분(3절) 그 노래의 댓가로 임할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이런 권고와 선언은 성전에서 예배의 인도 직책을 맡은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이 할 수 있다. 이 짧은 찬송은 제사장과,신도가 다 함께 부른 노래이다.
김정준은 이 찬송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무엇인가? 에 대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말한다.
첫째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섰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 말하는 “여호와의 종”은 예배 인도의 책임을 맡은 제사장이라 생각할 수 있다. 궁켈은 이 시가 “제사장의 찬송”과 “제사장의 축복”을 내용으로 한 찬송가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찬송을 제사장이 부르는 노래인 양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바이저 (Weiser)나 커크파트릭이나 브릭스나 크라우스 둥은 제 사장이라 지정하기보다는 일반 신도들이라 한다. 다후드(Dahood)는 이 “종”이란 말의 다른 뜻인 “노동하다”에서 “하나님의 일들”이라고 읽는다.
다음에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성소를 향하여”란 귀절은 원문에 없는 “향하여”를 보충한 것이 다. 이대로 읽으면, 이 시는 성전 안에서 부르는 찬송이라기보다는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부른 찬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향하여” 란 전치사가 없는 그대로 읽어 “성전에서”라 읽어도 무방하다.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사람이 기도할 때에 손을 들고 기도함을 말한다
손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곳이라 믿는 것을 알린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인간들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평범한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성전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든가, 성소 이외에서는 기도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손을 들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기의 기도를 들이 주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앙과 기도는 말만이 아니라, 서고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것 같은 육체적 율동이 함께 따르는 몸으로서 기도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찬송을 받으실 분은 “천지를 지으신 야웨요” 이 하나님은 손을 쳐들고 찬송을 부르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신다.
우리 신자들의 찬송의 주제는 창조주 하나님 에 대한 것이 으뜸이 된다. 하늘과 땅 그 자체도 또 그 속에 있는 만물들, 철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그 어느 하나도 우리 찬송의 대상되지 않음이 없다. 바다의 신비,대지의 신비, 창공의 신비, 그리고 자연 만물의 신.비, 창조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찬송의 대상이 된다.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맑은 날은 맑은 그것대로, 폭풍우도 모두가 창조주 하나님의 손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동양 사람,특히 한국 사람이 자연을 노래한 찬송은 많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는 이 아름다운 자연의 주인, 그 창조자 자신에 대한 노래를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조화옹(造化氣)으로만 알려진 창조주는 성서가 많은 자료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이 우리 문화에 전해야 할 사명 하나는, 자연을 아름답다고 노래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하여,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란 사상을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우리의 모든 찬송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찬송으로 절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찬송을 주저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하는 이 시의 마지막 귀절이 이 복을 알려준다.
이 시에서 “찬송하다”는 원어 “바라크”란 말과 “축복하다”는 말 “바라크”는 같은 말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축복을 받 은 사람은 찬송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이스라엘의 오랜 신앙경험에서 나온 지혜라 볼 수 있다. 찬송은 축복이요 축복은 곧 찬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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