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름을 사랑함.
우리는 어려서부터 ‘너는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를 익숙하게 듣고 자라왔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며 입시라는 관문 앞에서의 “남들과 같이 해서 어찌 남과 달라질 수 있겠느냐”
너의 다름을 위해 상급학교에 진학해야한다는 이야기들을 선생님으로 부터 수없이 들었다.
이 ‘다름’이라는 단어는 어떤 특별한 존재임을 표시할 무언가를 성취하라는 사인이었다.
우리는 우리그룹에서 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성공신화’라고 말한다. “개천에서 용났다”는 단어를 이때 사용한다.
사람들이 명품과 브랜드 차와 옷과 악세사리에 열광하는 이유도 무엇인가?. 내가 타는 차가 내가 입는 옷과 내가 걸친 액세스리가 남과 다른 나를 보여주기 위한 표식이 된다는 것이다. 남들이 내가 하는 명품을 하고 있으면, 나는 그것을 피해 또 한 단계 다른 브랜드의 명품을 가짐으로 내가 남과 다름을 보이려 한다. 이 ‘다름’의 경쟁은 우리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 뭔가 차별화된 특별한 사람임을 확인받고 싶어하는 뿌리 깊은 갈망에서 나온다.
2. 다름을 미워함.
우리는 또 이 ‘다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는 잣대로 삼는다. 우리의 그룹과는 다른 문화, 다른 옷차림, 다른 말투에 대해 고급과 저급을 나누며 사회적인 왕따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특수교육이라는 말을 통해, 장애인아이들에게는 일반인들과 분리된 특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일반적인 사회교육과 단절시킨다. 장애인들만 다니는 학교가 있고, 일반학교에 장애인이 없다는 것은 그들이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듣기에는 그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와 다른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 ‘다름’에 대한 열망과 또 차별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적으로 스며들어있다. 이것은 바로 인간이 태어나면서 죽기까지 서로 차별하며, 또 서로 차별당하며 사는 모습들이다. 하늘의 하나님이 보시면 참으로 웃음이 나오지 않으시겠는가? 하늘의 하나님 보실 때에 이런 인간들의 모습은 마치 도토리 키재기와 같을 것이다. 사천공항에서 인천가는 제주가는 비행기만 타 보아도 그렇다.
3. 같음을 선택함.
우리 모두는 뭔가 다른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열망하는 면에서는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고자 하셨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와는 다른 분이시다.
그분은 얼마나 인간과 똑같이 되기를 원하셨던지, 사람으로 그것도 아기로 태어나셨고, 또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자리에 줄을 서셨다. 또 죽으실 때도 사람들 중 가장 낮은 자리인 사형수들 틈에서, 두 행악자 사이에 까지 끼이셨다.
빌립보서 2:3-10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은 우주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심으로, 임마누엘로 우리가운데 오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심으로 우리를 아는 분이 되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내셨다.
세상 어느 종교에도 이런 이야기가 없다. 모두다 자신의 금욕과 절제와 수양을 통해, 득도의 수준에 이르고, 신의 경지에까지 올라야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내려와서 안아주고 들어주고 죽어주는 신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유진피터슨의 ‘The Message' 마가복음 서문에 이런 글이 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우리에게 특별한 뉴스거리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대부분의 시대에 걸쳐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또는 여러 신의 존재를 믿어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방식대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우신다는 사실은 정말 뉴스감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인가?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와 같아지심으로, 심지어 예수님께서 이 행악자들 틈에 끼이심으로, 그들과 함께 취급받으심으로 행악자인 우리의 죄의 짐을 가지고 가신 것이다.
이 주님 앞에서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분은 우리와 같이 되신 분이기에 우리의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아신다. 그분은 말로만이 아닌 체험으로 우리 고통을 체득하셨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잘 아노라”함은 그냥 말만 그럴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약하기 그지없는 아기로 이 땅에 오셨다. 독재적 왕이나 도덕적인 감시자가 아니라 천국을 떠나 다정한 친구로 우리에게 오셨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나는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다.
주님은 왕좌위에서 군림 하지 않으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 왕을 위한 황금과 제사장을 위한 유향과 죽어가는 사람을 위한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 그것은 바로 아기 예수님이 진정한 왕이시며, 완전한 제사장이며, 최고의 구원자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이 같아짐의 길을 택하신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번만이 아니라 거듭반복 하여 택하셨다.
열 두살의 나이에 이미 성전에서 학자들의 말을 듣고 질문도 하셨던 그 분이지만 서른 살이 될 때까지 나사렛이라는 이름 없는 마을에서 부모와 함께 살며 받들어 섬기셨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지만,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는 죄인들 무리와 같아지심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죄가 없으신 데도 죄인들과 나란히 줄서 계신 예수님.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 질문한다.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그는 주님이 자신에게 세례 받으려는 것을 말렸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금은 그렇게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다.”(마 3:14-15)
그분은 권세있는 구세주로서 요란한 팡파르가 울리며 나타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회개를 받는 수많은 죄인들 틈에 끼여 조용히 나타나신다. 그리고 그분의 이러한 선택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인정받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종려주일, 예수님은 군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다.
예수님은 왜 많은 짐승들 중에 하필 나귀를 타고자 하시는가? 이는 선지자 스가랴9:9의 말씀을 이루려하심이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우리 안에는 뭔가 달라지려는 욕심이 충만하다. 명예나 권력과 성공과 인기로 달라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같아지려는 길이었다. 그는 가난과 무력함과 연약함의 길로 오셨다. 이 길은 별로 매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길이 생명을 주는 길이다.
왜 임마누엘 하셨는가?
그분은 우리와 함께 길을 걷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임마누엘을 통해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하셨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를 변호하기 보호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삶의 모든 것들을 겪기 위해서 헌신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친밀한 하나님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주님은 그저 굶주린 이들을 먹이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시고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놓치기 쉬운 부분은 그분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그런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내장이 움직이는 깊은 긍휼로 그 일을 하셨음이다.
목자가 없이 유리방황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아픔을 느끼셨고,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느끼셨기에 주님은 능력을 행하신다. 주님이 왜 임마누엘 하셨나? 왜 우리와 다른 그분께서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분이 연약한 육신을 입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해답을 주고 있다.
(히 4:15-16)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두려움 없이 그분께 나갈 수 있도록, 담대히 나아가도록 우리곁에 조용히 다가오시는 긍휼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받으신 주님,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득하심으로 알고 계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도우시는 자비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이토록 친밀히 다가오시기 위해 심지어 떡이 되시고, 잔이 되셨다. 이것이 바로 성찬식이다. “이 떡은 너희를 위한 나의 몸이니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 그분은 십자가에 까지 낮아지셔서 자신을 우리를 영생케 하시기 위한 떡과 잔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주신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의 두 행악자 사이에까지 같아 지셨기에, 한편 강도는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며 “Jesus remenber me when you enter your kingdom"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때에 나를 기억해주소서” 간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그의 고통하는 자리에서 구원을 베푸실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주님께 예배함이 마땅치 않는가? 자신의 전부를 주신 주님 앞에서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림이 합당치 아니한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앞에 있어야할 우리를 구원하시길 위해 주님이 우리와 같은 자리에까지 오셨다.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
4. 같음을 따라감.
바울사도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설명하며,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이 우리와 상관없이 길이 아니다. 빌립보서 2장의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다. 3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신다. 남을 자신보다 낮게 여기려는 세대에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는 메시지다. 바울 자신도 (고전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 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했다.
(고전 9:19-23)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구약의 모세가 그러했다.
(히 11:24-26)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는 다름의 자리인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과 같아져 고난받는 자리로 내려왔다.
5. 우리의 퀘스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남들과 같아 질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도리어 반문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 와 있는데, 더 이상 어떻게 낮아집니까?
헨리나웬의 글에 The wounded healer가 있다. 바로 상처입은 치유자란 말이다. 상처를 가진사람 아픔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으로 발돋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장애가 있다면, 그 장애로 다른 사람의 장애를 이해하고, 우리에게 가난이 있다면, 그 가난으로 다른 사람의 가난을 살펴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 낙원이 아닌 실낙원의 세상에서 상처하나 가지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그 작은 상처로 이제 주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상처에 귀 기울이고 안아주고 섬겨주는 영적 감각을 키우도록 하자. 교회에 처음 온 새가족들과 함께 하자. 우리교회와 이웃의 연약한 지체들과 함께 하자.
거둠의 기도
주님, 당신을 우리를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작은 가시에도 피 흘리시는 이마, 창 끝에 찔리신 옆구리의 아픔, 타는 목마름을 견디다 못해 신 포도주를 마시셨습니다.
피 뭍은 형틀이, 태양이 다시 솟아오르듯 빛으로 살아나 어둠을 불사르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그렇게 강도들 틈에까지 낮아지셨습니다. 한 강도의 절규와 간구를 듣기 위해 그리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말씀하시기 위해 그 자리까지 달리셨습니다. 주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이 고난주간 주님의 십자가에 우리의 죄악을 참회하며 오직 주님 십자가만 붙들게 하소서.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곁의 연약한 자들의 아픔을 또한 보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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