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사도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읽고 있는 청중들에게 동일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었기 때문이다.
주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자들이다. 마치 같은 가족이 한 아버지의 자녀이듯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통해 한 믿음의 가족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왜 세상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가? 바르게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바른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기 때문인가? 몰라서 짓는 죄, 알고도 짓는 죄 분명 다를 것이다.
(딤후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부르신 자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은 뭔가 다른 사람, 구별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욕으로 부패된 삶이 아닌 신적 성품에 참예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세상속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 않은삶.
1/ 신기한 능력으로 얻은 구원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의 결과다. 은혜의 능력이고 용서의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받았다. 이미 영생에 참여하였고, 하나님의 성품에 걸맞은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될까? 대부분, 신의 형벌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옥 불에 영원히 타는 것이 두려워 예수를 믿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이 땅에서와 내세에서의 평안한 삶이 누리기 위해 기독교인이 되는 것같다. 또 어떤 경우 죽은 후까지도 자신의 삶을 보장받는 안전하고 값싼 보험정도로 기독교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게 된 목적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다. 욕심대로 정욕대로 이끌려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좇아가던 우리가 그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하나님의 자녀로 그분의 모습을 좇아 살게하려 한 것이다.
동식물의 세계에는 어떤 법칙이 존재한다. 어떤 식물은 햇빛을 봐야만 살 수 있고, 햇빛을 보면, 죽을 수 밖에 없어 꼭 그늘진 곳에만 사는 녀석도 있다.
동물의 경우 겨울이 되면, 개구리나 뱀 같는 놈들은 겨울잠을 자 줘야 한다. 왜? 변온동물은 주위의 기온에 따라 기온이 오르기도 하고 내리기도 한다. 추운날씨에 노출되면, 몸도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급기야 생명을 해하게 되기에, 그 법칙에 순응하기 위해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동면을 취함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들은 누가 가르쳐 줘서가 아니라 그들의 본능시스템이 그것을 말해준다.
“마른 풀만 먹고도 겨울을 이기는 염소여
하필이면 추운 나라만 찾아 다니는 기러기여‘ _ 김창완, ’인동일기 5‘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되기 위한 법칙은 무엇일까?
우리 마음속에는 행복을 좇아가고 불행을 피해가고자하는 양심이 있다.
우리는 그 양심의 소리를 통해 우리가 가야될 것과 멈출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2/ 삶으로 살아내는 구원
구원은 건짐과 동시에 삶이다(물속에서 건짐받고 그 이후의 삶) 자기 중심성을 벗고 사랑하는 삶이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우리의 왕으로 계신 예수님을 앎을 통해서 가능하다. 작은 예수로서 신성한 성품이 완성되는 사랑의 사람으로 지어져 간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분을 알고 그 약속을 붙들므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한다. 온갖 세상정욕에 부패해 가기 쉬운 우리라고 그분의 약속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리자.
(벧후 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믿음에서 사랑까지 하나씩 더해가는 더욱 힘씀이 필요하다. 나는 신앙의 비약만 바라지 않았는가? 우리가 더욱 신성한 성품에 자라가기 위해 힘쓸 것은 무엇인가?
(빌 2:12-13)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의 양심이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볼 때 참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모습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분의 사랑 용서 온유하심 오래 참으심....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의 삶을 부끄럽게 만들고 정죄하기 시작한다. 우리의 옹졸함 잘 삐침,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함, 쉽게 분내고 신경질 부림....예수님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지만, 우리가 사는 것은 섬기려함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온 종일 속삭인다.
“예수님이라면 이렇게 하셨을텐데 너는 왜 못하고 있느냐?”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알아줌과 나의 손익계산서에 이익이 되는 지를 철저히따진다.우리의 말과 행위는 그런대로 구색을 갖추어도 우리 마음의 자세까지 바꿀 수가 없다.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키엘케골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언제나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완벽주의기질의 엄마 앞에서 꾸중들을 준비가 된 자녀처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할 수 밖에 없는가? 2가지다. 그를 물리치던지 아니면 그 앞에 몸을 던져 꿇어 엎드러지든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지 아는가? 냉혹하고 까탈스런 주인을 모심으로 자신의 자유와 즐거움과 은밀한 죄악 행함을 간섭받고 포기당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이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도 원하지 않는 예배와 길고 지루한 설교, 헌금, 성경일기, 기도하기 등의 지루한 일을 강요받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부담이며, 무거운 쇠사슬이다. 만일 기독교가 그런 것이라면, 아마 무서운 고문기구가 될 것이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이 온 힘을 다해 예배하기 힘쓰나 실상 그것을 귀찮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죄를 짓는 데 있어서도 죄 자체를 싫어함이 아니라, 죄로 인해 오는 그 결과를 싫어하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거짓말 하는 것은 좋은데, 들통 나서 망신당하고 거짓말쟁이로 낙인찍히는 것이 싫고 게으른 것이 좋은데, 게으름으로 자신의 신세를 망치는 것이 싫고 남을 흉보고 싶은데, 그 소리가 본인의 귀에 들어가 서로 얼굴 붉히는 게 싫고... 술은 마시고 싶은데, 술 먹고 정신없는 행동하고, 오바이트하고, 술 깬 뒤에 머리 띵한 것이 싫고....
그렇다. 그때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제가 죄를 사랑한다는 것과 죄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거할 수 없음을 아십니다. 당신이 가까이 계실 때 나는 두렵습니다. 저는 이것을 고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를 돕지 아니하시면 저는 영원히 가망히 없습니다”
그때에 기적은 일어난다. 시73편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물 속에서 자유로운 물고기처럼 어머니 품에서 아기가 가장 편안히 쉬는 것처럼 기도로 내 마음을 열고 말씀으로 그 분의 음성을 들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이 된다.
(벧후 1:10-11)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예수님을 아는 일과 신성한 성품의 열매맺는 일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리의 옛 죄가 깨끗해진 것을 잊어버리고 맹인처럼 정욕에 허우적 되고 있지는 않았는가?
나를 부르시고 택하신 그분을 생각함으로 맹인처럼 넘어지지 않았고, 그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게 된다.
3/ 여정 중에 있는 구원
열매 없는 자가 있다. 영적인 눈이 없는 맹인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거룩하게 하신 은혜를 잊은 자들이 있다. 단지 상급을 적게 받을 자들이 아니다. 오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지 않으면 실족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걷는 순례자들이다.
결론
신앙의 여정, 신앙의 경주는 출발하기만 하면 도착과 완주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큰 약속이 성취되는 날이 오기까지 실족하지 않고 예수님이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가려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잡아야 한다. 부르신 기이한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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