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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후서 강해

베드로전서 5장 1-14절/ 시들지 않는 면류관

 

베드로전서의 마지막 부분을 우리는 보게된다. 흩어진 나그네의 삶을 세상가운데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음으로 살아라고 권고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때를 근신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힘주어 말하던 베드로는 이제 장로들과 젊은이 회중들에게 각각 필요한 태도를 가르쳐 주고 잇다.

 

  본문과 씨름하며

 

1. 장로들에 대한 권고

 

베드로는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한 자로서 장로들을 권면한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사도로 높혀서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자 하는 자세보다 자신도 장로임을 내세우며 초대교회 지도자들과 눈높이를 같이 하려 하였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된 사람들은 교회의 다른 일꾼과 나는 다르다는 의식을 보여주려하기 보다 믿음의 동역자의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진정한 섬김의 리더쉽을 보이신 것 같이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질 때 그들의 태도는 달라질 것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난의 증인과 영광에 참예 할 자로 밝힐 수 있겠는가? 영광을 바라보지만 고난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닌가? 주님의 마시는 잔에 동참하고 있는가?

 

장로들이 양무리를 칠 때 어떠해야하는가?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는 것이다.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것이다.

게네사렛 호수가에서 내 양을 치라는 주의 음성을 들은 베드로를 떠올리게 된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위에 주께서 그 양떼를 맡기신 것이다. 우리는 이 교사와 리더와 각부 임원의 일을 억지로 혹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까 싶어서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즐거운 뜻으로 하고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삯꾼 목자는 노략하는 이리와 같아서 겉으로는 양을 위하는 듯하나 속으로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거짓 목자이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분으로부터 받은 사명감이 불꽃이 꺼져갈 때 얼마든지 삯군이 될 수 있음을 알고 베드로사도는 이렇게 장로들을 권고하는 것이다.

양무리는 하나님의 것인데, 그들을 다스리려고 하기보다 모범이 되는 모습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할 것이다. 기도의 본이 없이 전도의 본이 없이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없는가? ‘돌격 앞으로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가 될 때에 양들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얻게되는 결과가 무엇인가?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교회의 목자장이 되시고 우리는 작은 목초지의 목동일 뿐이다. 이 땅의 칭찬과 명예와 보수의 시드는 영광을 바라보며 아쉬워 하기 보다, 운동경기의 골인점에서 승리자에게 안겨지는 면류관을 바라보자. 주님앞에서 내가 너를 안다하시는 자가 되어질 것이다.

 

 

2. 젊은이들에게 대한 권고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겸손하라고 한다. ?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며 때가 되면 그 분의 손으로 높이시기 때문이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는데, 허리를 동이는 모습은 노예들이 주인을 시중하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는 거스로 예수께서 주와 선생이 되시지만 수건으로 앞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습이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의식하며 겸손함으로 우리 위에 세우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섬기고 있는가?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순복과 겸손이라는 단어는 잊어버리고 있지 않는가? 분명 하나님이 때가 되면 그 분의 손으로 우리를 높여주실 것을 소망하고 믿는다면 겸손으로 허리를 동일 줄 아는 자가 되자.

3. 회중에 대한 권고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고 한다. 저가 너희를 권고하시기 때문이다. 악한자로부터 핍박이나 내면의 걱정과 고민 (6:25-34) 그리스도께서 내 일을 대신 염려하심을 믿고 나의 염려를 온전히 주께 맡길 수 있겠는가? 부모님이 재정이 풍족해서 등록금을 다 대어 주실 수 있는데, ‘과연 등록을 어떻게 하지? 돈은 어떻게 벌지?’ 고민하고 염려하는 아들이 있다면, 참으로 그 부모를 믿지 못하거나 갑자기 부도나 나거나 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권고하시는 그 하늘아버지는 모든 것에 부도라고는 없고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염려를 그 분에 대한 믿음속에 다 주께 맡겨버리는 것이다.

 

또한, 근신하고 깨어 있을 것을 말한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이다.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여러 믿음의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사자의 유혹이 얼마나 교묘하고 강력한지를 알아야 한다. 배고픈 사자가 삼킬자를 찾듯이 우리의 영혼의 빈틈을 노리고 있다. 우리의 믿음에는 얼마나 많은 허술한 부분이 많은가? 안일해진 우리의 믿음을 동여매고 깨어 있어야 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가? 잠간 고난 받는 너희를 친히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실 뿐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 가도록 우리를 향하여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찬송하며 신뢰하고 있는가? 삼킬자를 두루찾는 대적 마귀의 유혹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영광잠깐의 고난사이에서 주께서 친히신앙의 터 위에 위를 견고해 세워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나를 도우시는 그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드리자. 주님께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있다.

 

3. 문안인사

 

모든 은혜의 하나님, 하나님의 참된 은혜, 이 은혜에 굳게서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가 나그네같은 인생길에 가시밭길 같은 고난의길을 걸을 때 주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고난가운데서도 믿음에 굳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 보자.

이 편지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대필되어서 쓰여졌다. 그는 실라와 동일인물이다.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따라 안디옥에 파견되었으며 빌립보에서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다가 밤에 찬송함으로 옥문이 열려 살아난 사람이다. 그는 또는 이렇게 베드로와 동역하였으며 본 서신의 대필자 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베드로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것이었다.

함께 택하심을 입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리라고 한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로서 요한 또는 마가 요한으로 불리우고 마가복음의 저자이다. 이는 바울에게도 소중한 동역자였다. 이 마가를 향해 베드로는 내 아들'이라고 믿음안의 친밀감을 표하고 있다. 우리에 대한 가까운 지도자의 평가는 무엇인가? 신실함인가? 뺀질함인가? 많은 삶이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은 한 문장으로 남을 수 있다.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렇게 베드로의 첫 번째 편지는 종지부를 찍는다. 고난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피차간에 샬롬을 전하는 돌아봄이 필요하다.

 

  정곡을 콱 찌르며

 

양떼와 같은 성도들과 우는 사자같은 마귀가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이곳에서 목자장되신 우리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친히 도우심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삼킴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주께서는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자앞에 놓인 양떼같은 성도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으로 그들을 돌보며 자신을 지키는 근신하여 깨어있는 삶을 살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을 면류관을 주님 앞에서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