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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마가복음강해_ 막 11장 20-25절 _ 산을 옮기는 믿음_ 김광영목사





1/ 뿌리 채 마른 무화과 나무(20-21)


 

이른 아침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다가 말라버린 나무를 본다. 이 나무가 뿌리 채 말라버렸다는 것은 결실이 없는 예루살렘에 대한 상징이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상태에 이런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경건 참된 예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히는 것과 같다. 성전청결사건사이에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은 사건이 끼여 있는 것이 이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저주는 무모하고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라 의도적인 예언적 심판이었다. 무화과나무가 철을 맞이하지 못한 것은 예루살렘성전이 그리스도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아직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못한 것을 상징한다. 잎만 무성할뿐 열매없늠 무화과나무는 성전의 제사는 있지만 정작 주님이 간절히 기대하시는 영적 열매는 맺지못한 안타까운 상태이다. 말라 죽은 무화과나무의 운명은 성전이 직면하게 될 메시아적 심판을 보게 한다.



2/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되리라(22-23)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당신의 기적을 앞으로 제자들이 수행하게 될 기적의 모본으로 간주하신다. 그 기적들을 행하는 데 필요한 믿음을 가지도록 권면하신다. (특히,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진다는 표현은 성전 산이 심판당하는 모습을 연상하도록 해준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너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누가복음 17:6에서도 산에 대한 말은 없이 뿌리가 뽑혀 바다에 던져질 뽕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태복음 17:20에는 산에 대한 이야기가 똑같이 시작된다.


 

(17: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17: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산에 대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이해하자면 이 산은 감람산이고 바다는 감람산 아래 보이는 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장소나 시간에 매이지 않는 상징적인 진술이다.

 

(4:6-7) [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7]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이 비유는 확실히 신앙의 힘을 나타낸다. 옛 성전은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했다. 그리고 파괴될 운명에 직면했다. 하지만 진정한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 있는 제자들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의 뜻대로 다 응답받게 될 것이다.

 

3/ 용서하라(24-25)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신앙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하면, 기도는 이 신앙의 표현이다. 기도자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하고 그 뜻이 실현되기를 간구하게 된다.

(6: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인간이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깨닫는 신앙이 고려된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한 기도 응답의 확실성에 대한 보증과 더불어 용서의 중요성을 주지시킨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당시 기도자세는 보통 선 자세였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기 위한 전제로 동료 인간과 화해하라는 마음가짐이다.

두가지 사실이 언급되는데, 하나는 기도가 분노 때문에 오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인간관계와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자칫 제자가 먼저 용서하면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대가로 제자들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의 가르침에서 용서의 주도권이 철저히 하나님께 있다는 점은 아주 분명하다.

 

(18:23-27)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받은 제자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경우 그가 받은 용서의 효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명확히 제시한다.

 

(6:14-15)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특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경험해야 한다. 그 분과 친밀함을 가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