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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53th 약속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장12-22절

 

 

 

 

 

 

 

 

 



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8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20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22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주약교회 주일설교 김광영목사

 

 

 

 

 

마태복음 412-2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Sun 22th Sep 19

 

한 백만장자가 악어들을 수집해서 저택의 풀장에 풀어 놓았다. 그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파티 중 말을 열었다.

친애하는 내빈 여러분, 백만 달러나 내 딸을 드리리다. 악어들이 우글거리는 저 풀장을 가로질러 무사히 수영하는 사람이 있다면요

갑자기 풀장에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얼이 빠져 쳐다보았다. 한 남자가 제인을 구하려는 타잔처럼 능숙히 풀장을 가로질러 헤엄치고 있었다. 물살을 헤치고 나갈 때 마다 군중들은 환호했으며, 마침내 그는 무사히 건너편에 도착했다.백만장자는 매우 감명을 받고 말했다. “자네 정말 놀랍구먼, 훌륭해!” “뭘 원하는가? 내 딸인가, 백만 달러의 돈인가?”

남자 왈 대체 어던 자식이 날 떠밀었어....”

 

전문맥을 보면,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소리 세례요한이 등장한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리고 유대광야에 성령에 이끌려가서 마귀에서 시험을 받으시고 말씀으로 승리하신다.

 

예수께서 갈릴리 중심으로 거주하심(12-13)

 

예수님께서 요한의 잡히셨음을 듣고 거처로 어디로 옮기셨나? 유대광야 요단강 근처에 계시며 시험받으신 주님이 갈릴리로 물러나셨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의 가버나움에 사신다.

 

질문한다. 세례요한의 잡힘과 예수님의 행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었을까?

 

이사야 예언의 성취(14-16)

 

이것은 이사야 91-2절의 말씀의 성취이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로 표현되는 가난하고 외진 땅, 이방으로 치부되던 그곳에 빛으로 가신 예수님은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이루신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줄곧 소외당해 온 변방인 스불론 땅 납달리 땅, 곧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섞여 사는 갈릴리에서 메시아 예수님의 사역이 이루어진다.

갈릴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더는 소외의 땅인 변방이 아니라, 메시아의 구원 사역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핵심이 되었는데, 이는 이미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러하다. 중심부가 아닌 주변에서 시작하신다. 당시 강대국 로마가 아닌 식민지 팔레스타인 유대 땅, 유대에서도 왕궁이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닌, 변방의 갈릴리. 주님이 계심으로 그곳은 하나님 나라의 중심부가 되어 진다.

 

(고전 1:26-31)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천국을 전파하시며, 제자들을 부르심(17-22)

 

이 때부터, 어떤 메시지를 비로소 전파하셨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의 새로운 시작으로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시작을 알려는 17절은 동시에 예수님 사역의 전체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해 준다. 예수님의 선포 중심 메시지는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는 자로서 이미 선포한 하늘 나라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다. 그분의 통치가 있음을 말해 준다. ‘Repent, for Kingdom of heaven is near.’

 

어떻게 제자들을 부르시는가? 갈릴리 해변에 다니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 부름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신다.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른다.

 

요한의 때가 끝났고 예수님의 때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주님은 이방의 갈릴리,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의 땅에 큰 빛으로 거부하시며, 회개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신다. 모든 것이 이사야를 통해 예언한 하나님의 뜻의 성취이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가 남겨두고 떠나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성경은 온통 떠나라는 말과 따르라는 말로 가득 차 있다. 믿는 이들에게 있어 떠남과 따름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조상들은 익숙하던 세계를 벗어나 낯선 세계로 들어간 이들이다. 정착생활의 안락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떠도는 삶을 선택했다.

저마다 중심이 되려할 때, 세상은 전쟁터로 바뀐다. 자기편의만 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세상은 어두워진다. 과도한 욕망에 속절없이 끌려갈 때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불꽃은 꺼지고 만다.

신영복 선생은 <담론>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변화와 창조는 어디에서 시작이 되는가?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된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반도로, 다시 알프스 북부의 오지에서 600년 문화가 꽃핍니다. 그리고 북쪽 바닷가의 네델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그 중심부가 이동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은 중심부가 변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주입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통일했습니다. 거란과 몽고와 만주 등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중심부에 주입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의미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청산되지 않는 한 변방은 결코 창조 공간이 되지 못한합니다. 중심부보다 더 완고한 교조적 공간이 될 뿐이다.

 

순례자의 삶, 노마드적 삶이 우리를 세속의 욕망의 포로에서 탈주하게 한다.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이 바로 이 노마디즘이다. 노마드 [nomad]'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 (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를 이렇게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전 1:1-2).”

 

중국 작가 루쉰은 장학생으로 일본에서 의학공부를 하였다. 하지만 중퇴하고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한 작은 계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학교에서 본 영상 때문이었다.

일본인이 중국인을 처형하는데 둘러싼 중국인이 분노도 보이지 않고, 심지어 만세를 부르는 이도 있었던 것이다. ‘육신의 병보다는 정신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의학도의 길에서 작가의 길로 자신의 삶을 전향시켰다.

그가 남긴 명언이 있다.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독일총리 메르켈의 부친은 호르스트 카스너 목사이다. 1945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그는 질문 받았다.

파송 받고 싶은 곳이 어디입니까?”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겠습니다.“

그래서, 서독이 아닌 동독의 브란데부르크 작은 마을 템블린으로 파송받았다. 억압이 있는 그곳이야 말로 자기가 부름 받은 자리임을 알았다. 그리고 독일 총리 메르켈은 그곳에서 태어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순례자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정착은 힘의 논리지만 떠남은 자유의 논리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아닌 말씀의 길로 도주선을 따라나설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 캠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길의 3가지 가치를 제시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지 말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라.

풍요가 보장된 곳으로 가지 말고, 핍절한 곳으로 가라.

중심부로 가지 말고, 주변부로 가라.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었고, 그분을 따르는 자가 가야할 길이다. 내가 원하고 풍요가 보장되고 중심부인 곳, 그곳은 세상의 욕망에 충실한 자리이다. 그 욕망에 포획된 것에서 자유를 얻는 길은 또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 높음의 길에서 낮아짐을 선택하신 그 길이다.

 

마가복음 10장에서는 한 부자청년이 영생에 대한 고민을 가지고 나온다.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이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은 질문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구원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해 주신다. 그런데 사실 이 점이 예수님께서 지적하고자 한 것이다. 그 사람을 그처럼 호감 가는 제자 후보로 만들어 준 인간의 평가는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볼 때 전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27절 하반절에 구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고 밝히신다.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근거를 두며,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이 새로운 원리를 깨닫고 예수님의 충격적인 선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본 단락에서 영생과 상관된 몇 가지 개념들을 주목하게 된다. 예수님은 영생얻는 것을 묻는 질문(17)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답변하신다. 두 개념이 교환 가능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구원의 문제로 연결시키는데, 예수님은 그 연결을 인정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구원받는 것이 상호 교환적인 것이다.

 

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로 인한 영적 생활의 위험성은 서신서 에서도 강조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서 부에 대한 위험성을 지적한다.

 

(딤전 6:9-10)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7-18)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주님은 재물이 우상이 될 수 있음을 보다 분명하게 지적하신다.

 

(6:24-25)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존 화이트는 말한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중심만을 갖도록 지음 받았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10:28-31)

[28]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린 소유를 구체적으로 나열하신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여기 버린다(아피테미)’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적어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른 이후에도 여전히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마도 배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관계도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버린다

단어는 소유권 내지는 우선순위의 전환을 의미한다.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버린 소유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원리를 밝히신다. 버린 만큼 일대일로 돌려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제자가 버린 것과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돌려

주신다.

 

1028~31절을 보면, 베드로의 질문이 나온다. 예수님을 따르는 베드로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또 세금 받던 자리를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경제적인 안정을 포기했던 것이다. 주님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신다.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 누가와 마태는 여러 배(many times), 마가는 백배라는 최고의 보상으로 강조했다.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별하지 않는데, 누가는 현재의 보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다.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면 일용할 양식으로도 만족하며 살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장자여도 불만 속에 살 수 있다. 성도의 현실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있으므로 물질적인 어려움도 허다하지만, 예수님 안에 있으므로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의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놀라운 약속에 뒤이어 매우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