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갇힌 그 곳에 오게 된 특별한 사람이 둘 있었다.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였다. 요셉이 갇힌 옥은 친위대장의 집안에 있는 옥이었다.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 들게 하고 요셉이 그들을 섬기는 자가되었다.
갇힌 지 여러 날이 지나 그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달랐다.
1. 충성된 삶
요셉은 아침에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것을 알았다. 요셉이 얼마나 섬세하고 그들을 수종 들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비록 감옥에서 언제까지 갇혀있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막막한 세월을 보내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들에 최선을 다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취향과 꿈과 맞지 아니한 일을 한다고, 현재의 일을 등한시 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달란트와 므나 비유를 통해서, 작은 일에 충성된 자에게 큰 일을 맡기고, 남의 것에 충성된 자에게 자신의 것을 맡긴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에 충성됨을 요구하신다. 비록 그것이 별로 내게 맞지 않는 일이라 할찌라도 주님이 맡기신 일임을 믿고 최선을 다해보자.
요셉은 비록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며 세월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의 상처와 고통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감옥안의 다른 사람의 고통을 돌아보았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의 분노나 질투 혹은 거절을 감정을 발돋움해야만 하고 움직여야만 한다. 그 유혹은 우리의 부정적 감정을 찔러댈 수 있고, 마치 우리가 거기에 속한 것 처럼 그것 안에서 찌르게 된다. 그때 우리는 방어하고, 잊어버리거나, 폐기처분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가 그러한 부정적인 정체감을 붙잡고 있을 수 있고, 심지어는 그 안에 병적인집착의 즐거움에 점령될 수 있다. 그런 어둔 감정들을 보는 것도 좋고, 그들이 떠나온 곳을 탐색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것들을 발돋움하는 순간, 뒤에 숨겨나 떠나게 된다."
우리를 상처를 발돋움해야 한다. 그 방법중에 하나가, 나 곁의 다른사람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고통을 상담하고 도움을 청하는 이가 있는가? 우리가 너무 바빠서 아무도 우리에게 자신의 상처를 이야기하기 힘들어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들은 요셉의 요청에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의 근심의 원인은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2. 해석자를 구함
세상의 사람들이 근심하는 이유가 이 두 관원장과 같다. 많은 일들이 주변에서 일어나고 그 일들로 마음이 어지러운데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요셉은 말한다. "청하건데 내게 이르소서." 그 꿈에 대한 해석을 해 줄 수 있다는것이다. 그 이유는 8절의 말처럼 "해석은 하나님께 있기"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대언해 줄 수 있는 요셉에게 두 관원장은 자신의 꿈을 풀어낸다.
우리 주변에 얼굴빛이 어두운 자들. 근심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을 해석해 주고,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자를 볼 때 그들은 소망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우리자신이 그 해석을 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 대하여 분명해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말씀에 충만히 거하여 그 말씀으로 그들의 고민을 듣고, 또 해석해 줄 수 있다는 우리 또한 요셉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줄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꾼 꿈은 이러하다.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바로의 손에 드렸다는 것이다.
요셉은 이 세 가지를 3일로 해석한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전직을 회복하여, 바로의 잔에 술 담는 그 일을 하리라는 것이다.
3.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요셉은 이렇게 꿈을 명쾌하게 해석한후, 그에게 당부한다.
14절이하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의 결백이 호소되고 있는 장면이다.
그는 소망을 붙들기를 원했다.
그런데, 후문맥의 23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고 기록한다. 사람은 그를 잊었다. "원수는 돌에 새기지만, 은혜에 물에 새긴다"는 속담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으셨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지만, 그들을 유일한 소망인양 바라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오직 믿고 신뢰할 분은 한분 하나님 밖에 없다.
(시 91:14)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떡 굽는 관원장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을 듣고,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자신의 꿈도 내 놓는다.
꿈의 내용인즉, 내 머리에 흰떡 3광주리가 있고,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해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어 버렸다.
요셉은 해석한다.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NIV "hang you on a tree"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말뚝에 내건다는 것이다. 요셉은 떡 굽는 관원장에게 가혹한 형벌을 예언한다. 처형되고 걸려 전시되는 끔찍한 죽음이다.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길한 예언도 했지만, 떡 굽는 관원장에게 불길한 예언도 서슴치 않는다. 왜냐하면, 요셉은 그 해석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 사람들은 자신에게 좋은 이야기 길한 징조만을 이야기 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 그들에게 그들의 치부를 드러내거나, 심판을 말한다면 등을 돌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는 성경의 이야기에 더하거나 뺌이 없이 솔직한 진실만을 이야기 해 주어야 한다. 그것이 비록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이 되더라도 말이다.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이 심판의 이야기 이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인은 심판을 벗어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자 되신다는 진실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고 있지는 않는가?
또한, 성경에 많은 예언자들이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가려 읽는 경우가 많다. 복된 말씀 긍정적인 말씀만 보려한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의 상처를 감싸 안지만, 우리의 속을 뒤틀리게 하고 힘들게 하는 말씀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취향대로 그것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두어야 한다. 성령이 성경을 통해 우리자신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도록 하여야 한다.
성경의 소선지서의 말씀을 읽고 있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눈앞에 온 듯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나훔 1:2-3)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그런데, 가장 설교가 되지 않는 본문중의 하나가 소선지서이다. 성경은 창세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만 있는 것도 아니다.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을 골고루 섭취하여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몸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해주는 의사를 찾아 치료를 해야지, 듣기 좋은 말만하는 의사를 찾아서는 되지 않듯이, 우리의 진상을 솔직히 드러내 주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우리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
어느 목사님이 대 기업의 간부들에게 설교할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성경의 많은 본문중에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본문을 하나님 말씀으로 깨닫고 증거했다. 경제에 있어 눈 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부요치 못한 어리석은자의 모습을 생각케 하는 말씀이었다.
청중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말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씀이 그들에게 들려져야 될 말씀으로 묵상되었기에 과감하게 선포했다. 그 때에 한 간부가 와서 말했단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와서 축복에 말씀을 전해준 설교자는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의 어리석음을 정확하게 깨닫게 하는 말씀을 전해준 설교자는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기록한다.
갈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이다.”
요셉은 그랬다. 길한 것이든, 불길한 것이든, 있는 진실 그대로를 말해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사흘 후가 바로 바로의 생일이었다. 그때 잔치가 베풀어지고,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이 출옥한다. 그런데, 요셉의 해석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그 전직을 회복하되, 떡 굽는 관원장은 나무에 매달려 죽임을 당한다.
한편, 우리는 요셉의 상황에 주목해 보자.
보디발은 관원장들이 자신이 관리하는 감옥에 들어왔을 때 잘 대해줄 필요를 알았다. 향후 이들이 때문에 정치적 입지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요셉의 일처리와 인격을 지켜본 보디발이 그에게 그들을 수발하는 일들을 맡긴 것이다.
요셉은 이 감옥학교를 통해, 애굽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갖추어 나갔다. 감옥이 곧 학교요 훈련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시간에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기 위해 2년동안을 더 그곳에 머물러 있게 하셨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않고 잊어 버렸지만, 그 잊어버린 시간에도 주님은 요셉을 준비시키는 시간으로 사용하셨다.
다음장 창세기 41장에서 바로는 꿈을 꾼다. 그리고, 해석할 자를 찾는다.
그때에야 술맡은 관원장이 바로앞에서 자신이 갇혔을때을 떠올린다.
“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우리가 그에게 말하매 그가 우리의 꿈을 풀되 그 꿈대로 각 사람에게 해석하더니, 그해석한 대로 나는 복직되고 그는 매달렸나이다.(창41:12-13)”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불렀는데, 창41:36을 보니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세’라고 기록한다. 하나님의 시간이 찼을 때, 그가 애굽의 총리로 일할때가 온 것이다. (애굽에서는 만 30세가 되어야 고급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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