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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약속 말씀

45th 약속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요한복음 2장1-11절





주약교회 주일설교








김광영 목사






































































































































































































































































































































































































































































































































































































































































































































예수님의 공생애에 많은 사역이 있지만, 그것을 꿰뚫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포도주이다. 가나 혼인잔치의 첫 기적이 바로 가나의 혼인집의 포도주 사건이고, 그 마지막이 공생애 마지막 날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포도주이다.


 본문과 씨름하며


1. 예수님이 초청받으신 잔치


사흘째 되던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 계시고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 예수님이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예수님을 흥을 깨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분은 또한 기꺼이 그 초대에 응하사 그곳에 계셨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아주 심각한 존재로, 내 삶의 즐거움을 앗아가는 깐깐한 잔소리꾼으로 생각하고, 뭐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무서운 얼굴을 지닌 분으로 그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잔치에 초대되시고 그 곳에 함께하신 예수님을 보라.

여기서 우리가 질문해 볼 수 있는 것은 사흘째 되던 날 왜 사흘째 되던 날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청함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흘은 언제부터 사흘을 또한 말하는 것인가? 혼인잔치가 열린지 사흘인가?

유대인들은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과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영어의 본고장 영국 사람들이 그들의 신인 오딘, 토로, 프레야 등의 이름을 따서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등으로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요일을 나타내는 단어로, 첫째날(일요일), 둘재날(월요일), 셋째날(화요일) 이렇게 사용한다.

가나혼인 잔치의 시간적 배경이 된 사흘 되던 날은 히브리어 표현으로 셋째날 곧 화요일을 의미하는 것이다. 언제부터 세 번째날인가? 안식일(토요일)로부터 세 번째 날인 것이다. 이 사흘째 되던 날은 셋째날 곧 화요일을 지칭하는 히브리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사흘되던 날  셋째날 가나혼인잔치에 가신 것일까?

이 셋째날은 창조기사에서 바다로 덮여있던 지구에서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육지가 드러난 날이다. 해양 민족인 두로와 시돈 사람에게 뭍이 드러난 사건은 별반 관심이 없을 수 있겠지만,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온통 바닷물로 덮여 있던 지구에서 뭍이 드러난 사건은 굿뉴스중의 최고의 뉴스이다. 셋째날 기사를 보면 다른 날과 달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한다.

바다에서 육지가 드러난 셋째날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최고의 기쁨과 축복의 날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도 셋째날이 화요일에 결혼을 많이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화요일은 교통체증이 심한 평일에 하객들도 참여하기 힘든날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셋째날이 최고의 축복된 날인 것이다.

세째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


2. 포도주가 모자람


그런데, 3절을 보니 포도주가 떨어졌다.

화요일에 시작된 결혼잔치 하지만, 결혼식은 유대인들은 1주일을 지속했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날은 잔치가 끝나가는 일곱 번째 날이 되기 쉽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성서시대 유대인의 결혼예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 총각이 처녀를 보고 마음에 들면 그는 아버지를 졸라서 잔치 비용을 타낸다. 총각은 이 돈을 가지고 처녀의 집에 가서 잔치를 벌인다. 이때 처녀의 가족과 친구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성대한 잔치가 일주일동안 열린다. 함께 먹고 자고 마시는 잔치에서처녀는 총각을 유심히 살펴볼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 총각은 처녀 앞에 포도주를 놓는다. 이때 처녀가 그 포도주를 마시면 총각을 남편으로 맞이하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시지 않으면 총각은 잔치 비용만 날리고 풀이 죽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

처녀 앞에 도주를 놓고 선택을 기다리는 순간은 수험생이 대입발표를 기다리는 것보다 더 조마조마한 순간일 것이다.

만일, 처녀가 포도주를 마신다면 총각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아버지 집으로 간다. 신부와 함께 살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다. 이렇게 잔치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 포도주이다.

그런데 이 포도주가 부족했다. 이것은 초청된 손님들에게 대단히 실례가 되었다. 뿐만아니라 잔치를 베푼 신랑에게도 난감한 상황이다. 이것은 앙꼬없는 찐빵이요, 포도주 없는 잔치집이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심각한 상황에 예수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예수님의 반응은 어떤가? “여자여 나와 무슨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우리는 여자여라는 단어에서 예수님을 버릇없는 아들로 생각할 수 있다.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다니... 하지만, 이 표현은 영어의 dear woman이라는 단어로 아주 친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 이것은 내하고 상관없다는 냉정한 언어로 이해될 수 있지만, 보다 부드러운 말투이다. “왜 당신은 저에게 이러한 부족을 이야기합니까? 당신과 마찬가지로 나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언급하시며, 아직 그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3. 하인들의 순종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행하시던지 그대로 하라고 한다.

거기에는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 개가 놓여있었다.

개역성경에서 이렇게 번역되었고,

오늘 우리가 읽은 개정개역에서는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라고 되어있다.

유대인의 결례는 다름아닌 정결예식인 것이고, 이것을 위해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손위에 물을 부음으로 손을 씻고 그릇들을 씻었다. 물을 담는 항아리는 돌로 만들어졌다.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씻기 위해 거기 놓여진 것들이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하신다. 그들은 물을 퍼서 항아리의 아구까지 채우고 있다.

다음 말씀은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것이다. 하인들은 갖다준다.

예수님은 왜 손님들에게 포도주를 주실 생각을 하셨는가? 그분은 혼인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의 흥을 깨기 원치 않으셨다. 포도주는 혼인잔치에서 중요하고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포도주를 마련하심으로 신랑의 난감함을 모면케 해 주셨다.


4. 물이 포도주가 됨


이제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니 연회장은 포도주를 맛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고 신랑을 불러 말한다.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이 혼인잔치의 위기는 예수님께서 물로 만드신 최고급 포도주로 인해 흥이 더해갔다.

예수님께서 이 처음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었다.

왜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나?

물이 귀한 광야의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술이 아닌 음료수였고, 그것도 생명을 살리는 음료수였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는 8, 9월 무렵이다. 햇빛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으로 숨쉬기조차 힘든 계절이다. 모든 땅이 회색빛으로 타들어 가는 이스라엘에서 청포도가 영글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포도를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건기의 끝 무렵인 포도 수확기는 웅덩이에 모아놓은 물이 바닥을 드러내는 때이다.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물이었다. 그들은 생명같은 물이 바닥날 즈음에, 정확히 때를 맞춰 회색빛 광야를 뒤로한 채 한껏 영근 청포도를 따서 포도주틀에서 밟았다.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자연스럽게 해갈의 기쁜이 된 것이다.


 정곡을 콱 찌르며


예수님은 혼인잔치에 있어야 할 것이 빠져버렸을 때 그것을 채우셨다.

우리의 삶에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에덴을 주셨다. 에덴은 바로 기쁨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기쁨가운데 살도록 창조하셨다. 우리의 삶이 마치 수도승처럼 혹은 장례식장처럼 기쁨이 죽어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신앙생활하는 것이 마치 고리타분한 사람처럼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서신서를 통해 내가 이것을 쓰는 것은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함이라,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즐거움 가운데 함께 기뻐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기쁨을 주기 위해 오셨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에 포도주를 채우시는 주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한 이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자신을 참포도나무로 선포하신다. 이는 예수님만이 인생의 기쁨과 만족과 축복의 근원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