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
7월 첫 번째 주일, 한 해의 전반기가 끝나는 주간으로 맥추감사절로 지킨다. 이모작을 하는 한국에서는 한 해의 전반기에는 ‘보리수확’을 하고, 후반기에는 ‘쌀 수확’을 한다. 맥추절은 말 그대로 “보리를 수확하는 날”이다. 맥추감사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지난 반년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앞으로 남은 반년 동안도 잘 지켜주시기를 기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7월 첫 번째 주일에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농경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농경문화가 퇴색되어 가면서 맥추감사절의 의미도 점차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래 맥추절은 구약의 3대 절기중 하나로 오순절 혹은 칠칠절이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전 세계에서 맥추감사절을 지키는 민족은 유대인과 한국인뿐이라고 한다.
맥추감사절이 한국의 전통이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신앙의 선배들에게 보리 추수의 기쁨이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도, 가르친 것도 아닌데 매년 자발적으로 이곳저곳에서 드리는 감사가 반복되어 감사절기가 되었다.
비교적 먹을 것이 많은 여름이 아니라, 오직 쌀을 주식 삼아 긴 겨울을 보낸 우리에게 초여름 보리를 추수할 때까지 가장 배고픈 시절을 보내야 했다. 이때를 춘곤기, 보릿고개라고 한다.
‘추풍령, 대관령 고개보다 더 높고 호랑이, 사자보다 더 무서운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모든 농토를 강제로 빼앗고 농작물의 반을 세금으로 거둬갔다. 그리고 전쟁 군량미로 빼앗아가고 만주에서 가져온 좁쌀로 연명케 했다.
긴긴 겨울 밤 굶주림에 허덕이면서 보리가 자리기만 기다리며 지냈다. 이때 풀뿌리, 솔잎, 소나무껍질을 먹었고 싸라기를 산채와 나물의 묽은 죽에 띄워 먹었다. 수많은 이들이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죽었다.
6.25동란을 거치면서 보릿고개는 19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보리가 익어 추수했을 때 살아남은 성도들은 제일 먼저 보리 가마를 들고 하나님께 나와 눈물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맥추감사절. 감사의 근거는 무엇인가?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주판알을 튕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행위에 상관없이 거저 주신 은혜이다.
우리 쓴 뿌리를 단적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다.
“은혜를 모르는 놈.... 내가 어떻게 도와 주었는데...”
하지만, 우리가 은혜 받은 자의 삶은, 거저 받은 은혜로 인해 거저 줄 수 있는 마음이며 삶이다.
눅 17:19 ‘너희도 명령한 것을 다 행한 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할 것이니라’
노르웨이의 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에 사탄이 지구에 내려와 하필 노르웨이에다가 창고를 지웠다는 것입니다. 그 사탄의 창고에는 각종 씨앗들, 즉 미움, 슬픔, 눈물 등의 씨앗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이 씨앗들은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서도 싹이 잘 나는데, 오직 한 동네에서만은 효력이 없었다. 이 동네의 이름은 '감사'였는데, 어떤 슬픈 상황과 절망적인 처지에서도 그들은 언제나 감사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서 '감사하는 마음에는 사탄이 씨앗을 뿌릴 수 없다'라는 노르웨이 속담이 나왔다고 한다.
1/ 베드로의 질문
예수님께서 형제의 죄 범함에 대해 권고할 것에 대해 말씀하셨고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베드로가 “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할까요? ”라고 묻고 있다.
당시 랍비들의 말에는 “ 만약 어떤 형제가 너에게 한 번 죄를 지으면 용서하라, 두 번 지어도 용서하라, 세 번 지어도 용서하라, 그러나, 네 번째는 용서하지 말라”는 교훈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 일곱 번까지 할까요? ”하고 묻는다. 아마도 그렇다면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이성적으로 인내 할 수 있는 한계선이라고 생각하고 그 당시의 기준보다는 조금 더 높게 잡았는지 모르겠다. 7이라는 숫자가 안식일의 개념으로 완전하게 생각되어서 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은 “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할지니라 ”고 하신다. 어떤 주석가는 창4:24의 라멕의 전쟁노래에 대한 암시로 보았다. 라멕의 가인의 후손이었다. 하나님은 “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배나 받으리라 ”고 말씀하셨다. 전쟁의 노래에서 라멕은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여 자기에게 손을 대면 무사하지 못하다고 자랑했다.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로다 ” 일흔번씩 일곱 번배의 복수, 고대의 보복과 형벌이 그처럼 끝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용서는 복수의 한계보다 훨씬 큰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용서의 끝을 정하지 않는 무제한적인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 물음에 대해 탕감해주지 않는 종의 비유로 답변을 하고 계신다. 그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반복해서 용서하라고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확증해 주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왕은 종들을 회계하는데, 그 때에 한 사람이 붙들려 온다. 마치 포청천의 죄인처럼 말이다. 그가 자발적으로 신고 했다기 보다 숨겨오다가 그 심판의 날에 발각된 것이다. 그는 만달란트를 주인에게 빚졌다. 만달란트는 어떤 돈인가? 건장한 남자가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해서 그 수고의 대가로 받는 돈이 1데나리온 인데, 1달란트는 데나리온의 600배이다. 그런데, 만달란트라니 그것은 6,000,000일(10년 3650일, 100년 3만6500일) 동안 일해야 갚을 수 있는돈이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당시 유대전역에서 각출된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였다는데 그렇다면 1만달란트의 가치는 어마어마하지 않는가?
그 종은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들에게 명령하여 “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하라 ”고 분노하여 호통친다. 그 종은 엎드려 벌벌떨고 절하며 간청하게 된다. “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 아마 상식적으로 막대한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다만 임금의 노여움을 일순간 만이라도 모면하기 위해 벌벌떠면 엎드려져 “ 죽을 목숨 한번만 살려달라는 심정으로 ” 참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본 주인은 그 모습을 불쌍히 여긴다. 마치 아버지가 탕자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맟추듯이 말이다. 그리고 임금은 그 빚 모두를 탕감하여 준다. 단지 시간적 여유를 두고 갚으라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는 것이다. 방금까지 “ 네 몸과 아내와 자식까지 다 팔아 갚으라고 ” 호통 치던 그 임금님이 말이다. 임금님의 이 호통의 의도는 이로 보아 그 종이 자신의 빚이 얼마나 어마 어마 한지를 알게하고 스스로 힘으로 갚을 수 없음을 인정케하여 끝내 임금에게 자비를 간구하게하려 했던 것일 것이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다.
어쨌던 죽을 줄로만 알았던 이 종은 너무나 감격해 하며, 그 재판정을 나오고 있었다. 아직도 그 눈가에 채 눈물이 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가는 그 길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난다. 이 종은 이 사람이 자신에게 빚지고 갚지 않은 것에 대해 화가나서 멱살을 붙들어 잡고 “ 빚을 갚으라 ”고 독촉한다.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길 “나를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이것은 단지 일시적인 분노의 모면을 위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 동관의 부채는 100여일 노동으로 갚을 수 있는 소액의 부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허락지 않고 저가 빚을 갚도록 도망가지 못하게 옥에 가두어 두었다. 임금은 그를 놓아 보내주었는데 그는 자기 손으로 직접 채무자를 옥에 가둔 것이다. 채무로 인해 사람을 투옥시키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이경우는 너무 심하다. 헐값의 노예라도 500데나리온에 팔리는데 그 동관을 100데나리온을 이유로 가둔 것은 억울한 처사이다.
이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들이 심히 민망히 여겨 주인에게 이 일을 다 고한다. 이제 주인이 다시 저를 부른다. “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고 호통을 친다. 주인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그 탕감해 주기로 한 빚을 다 갚도록 옥졸들에게 붙여둔다. 단지 옥을 지키는 간수가 아니라 고통을 주는 고문관들에게 붙여둔 것이다.
한번 허락한 용서를 취소하다니? 하나님께서는 정말 그런 일을 하지 않으실 것이다. 정말 그렇까?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실로 난해한 말씀이다.
누가복음 17:3,4에서는 “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 고 하신다.
누가복음 11:4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죄>라고 하는 말로 쓰신 단어는 아람어의 <빚>이라는 말과 꼭 같은 말이다. “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시고 ”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그가 받은 손해를 이미 용서 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솔직하게 간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마태는 주기도문 뒤에 이 용서 이야기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 하시리라 ” (마6:14-15)
우리는 이것을 보며, 참으로 은혜를 모르고, 악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그 종을 손가락질 할지 모른다. 그런데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후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찔림을 받게 된다.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용서를 몇 번 하는 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중심으로 진실하게 우리의 형제들의 나에 대한 잘못에 용서를 베풀지 않으면 “ 그 빚을 다 갚도록 우리를 옥졸에게 붙이겠다 ”는 말씀이다.
골 3:13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
엡 4:32 서로 친절하게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진주 주약교회 주일설교 맥추감사절 김광영 목사 설교
우리의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할만하고 영원히 지옥 불에 고통당해야만 할 죄의 문제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단번에 용서하시고 하나님나라를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형제들의 작은 잘못을 우리는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 오늘 이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묵상하며 기도합시다.
우리는 만달란트 빚진 자와 같고, 종일 놀고 섰는 포도원 앞의 품꾼들과 같은 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졌다.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의 깊이를 알고 감사하는 것, 그것은 내게 해를 끼친 이웃의 잘못에 대해 용서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열정 있는 전도와 봉사와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다 갚을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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