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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 119편 121-144절 (6번째) 주의 계명들을 사모함으로

 

 아는 선배의 귀촌생활하는 집을 방문한적이 있다. 내게 눈에 쏙 들어온 것은 제비의 집이었다. 처마 끝 틈 사이에 제법 단단한 집을 지었다. 새끼들 몇마리가 입을 내밀고 있다. 지지배배.. 제비들은 소리를 낸다. 한 순간 어미는 벌레를 물어오고 잽싸게 새끼들의 입에 집어 넣고는 돌연 사라진다. 새끼 제비들이 그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헐떡거리듯 목을 빼들고 소리를 지른다.

 시편 119편 오늘 본문의 시인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고 고백한다. 말씀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시인은 고난의 상황속에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는(136절) 어려움속에서 그 계명의 말씀을 향해 헐떡였다. 그것이 그에게 생명이 되고 소망이 되고 삶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1/ 아인(16번째) : 121-128

 

[121]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2]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23]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24]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5] 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6]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27]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각 구절의 첫 자음으로 시작하는 아인으로 시작하는 121128절에도 여전히 대적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특히 121절과 122절에 나오는박해아샤크: 짓 누르다가 이 단락의 배경을 드러내 준다. 그리고 121 절과 124절에 나오는 동사 행하다아서가 소 단락을 나누는 기준점이 되어. 121124절과 125128절의 두 단락으로 나뉘고 있다.

 

123절의 내 눈이 지치는 줄도 모르고 말씀을 기다린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문득 욥이 생각난다. 욥은참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모진 고난이 닥쳐오자 자신의 의로움과 억울함을 주장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욥기 막바지에 가서 하나님은 그런 욥에게 그 가 왜 고난을 겪었는지 그 까닭을 가르쳐 주시기보다는 피조 세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셨다. 그러자 욥은 4256에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 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했다. 말씀에서, 자연에서, 옆 사람에게서, 그야말로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눈이 열렸다. 우리도 신앙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시인은 자신을 주의종이라고 반복해서 부르며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122,124,125. 그는 교만한 자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있지만121122,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버티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127.

그러나 견딘다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하나님의 보증을 요청합니다122123. 부동산이나 큰 액수의 물건을 거래할 때 보증금을 주고받습니다. 보증금을 받으면 잔금을 받을 때까지 그 돈을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시인은 지금 당장 여호와께서 일하셔서 주님의 법을 폐하는 악인들을 심판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26.

그러나 아직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되지 않아 저들을 심판하실 수 없다면, 비유적으로. 나머지 잔금을 다치러 주실 때가 아직 안되었다면, 보증금이라도 주셔서 지금 당하는 어려움을 견디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너무 견디기가 어려워서 하나님께 보증금을 요청할 정도라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거짓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 평탄 하고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낙심하지 않고 꿋꿋하게 하나님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있습니다128. 분명한 것은 언젠가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비록눈앞의 현실이 말씀대로살아가기 힘들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17번째) : 129-136

 

 

말씀과 자신의 관계

[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대적에 둘러싸인 자신의 상황

[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4]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각 구절의 첫 자음이 로 시작하는 129136절은 내용에 따라 두 단락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다. 129132 절에서는 시인이 말씀과 자신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133136절에서는 대적에 둘러싸인 자신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묵상한다.

 

130절에는 말씀이 열리고 빛이 비치어 깨달음을 준다는 표현이 있다. 135절에도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셔서 말씀으로 가르치신다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종종 말씀의 계시라는 차원으로 이해된다. 과연 오늘 우리는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구약성경을 주석exegesis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주석이나 말씀묵상은엑스에게시스exegesis, 곧 말씀에서 의미를 끌어내야지, ‘에이스-에게시스eis- egesis, 곧 내가 뜻하는 바를 말씀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빛이 비치면 밝아지듯, 말씀의 빛으로 나를 조명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말씀을 대하는 가장 기본자세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는 자세가 아니겠는가?

 

 

131절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내가 열고에 해당하는 파아르티는, ‘크게 벌리다라는 뜻이다. ‘헐떡였나이다에 해당하는, ‘기다리다’, ‘갈망하다’, ‘헐떡이다라는 뜻이다. 이는 강력한 내적 열망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시인이 얼마나 간절히 주의 계명을 사모했는지를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세상 사람들은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드는 사람을 융통성이 없다거나, ‘꽉 막혔다고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우둔한자 를 얼마나 지혜롭게 하는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 계명들을 사모하고, 어떻게든 계명들을 알고 깨닫고자 노력했습니다 129131. 주위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말씀을 알려고 하지 않지만, 그는 주의 이름을 사랑한자들이 받았던 은혜를 말씀을 통해 알았기에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132.

시인이 처한 상황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주위에는 주님의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하 고, 시인은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는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136.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말씀에 굳게 서고, 어떤 죄악이라 하더라도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133. 그리고 사람들의 박해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호소합니다134.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고 남들이 사용하는 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가 아니라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가되어야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 워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하는 데 깊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교회도 홍보와 마케팅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따라가는 지도자들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기준이라는 사실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어떤 비웃음이나 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오직 말씀을 붙잡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3/ 짜데(18번째) : 137-144

 

[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이 단락의 모든구절은 쨔데로 시작한다. 이 단락은 첫 구절인 137절과 마지막구절인 144절이 의롭다'라는 뜻의 낱말137절은 차디크, 144절은 체데크로 수미쌍관inclusio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이 단락의 주제인데, 모든 구절이 짜데로 시작하는 단락의 특성에 맞게 이 낱말이 단락 전반에 걸쳐 사용된다138. 142.특히 137절에서는 이 낱말이 여호와의 성품에 적용되고, 144절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적용되면서 시인의 간구로 이어진다.

 

 

[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은 그럴듯한 책자니 한번 믿어 보라거나, 번지르한 말로 전도하는 것을 한번 믿어 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말씀의 변치 않는 진리와 역사하는 능력은 수세기에 걸쳐 입증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떠한 사람의 말도 하나님의 말씀처럼 철저히 검증되고 전적으로 신뢰할 만 하지 아니하다.

_유진피터슨, 시편으로 드리는 매일기도, 이철민 옮김, 홍성사, 294

 

본문에서 특히 137139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새롭게 등장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137절과 138절은 한결같고 옳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시인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140절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런데 139절은 이 고백과 반대되는 상황을 그려 준다. 이런 상황은 141, 143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말씀을 잊어버린, 곧 말씀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그려진다.

말씀을 향한 열정이 시인을 삼켰다는 것은 그릇된 현실을 향해 시인이 취하는 과감한 태도를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이 배가 고파 입을 벌리고 헐떡이듯, 상황이 어떠하든지 오로지 말씀을 향한 열정을 불태우겠다는 고백이다. 141절과143 절에서 볼 수 있듯이,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말씀에서 어긋난 현실은 그냥 보아넘기지 않고 목소리를 발한다는 고백으로 여길 수도 있다.

삶을 살아가다보면, 고난이 마치 우리 삶의 전제 조건처럼 거듭, 되다가 느닷없이 닥쳐온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시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열정, 그 말씀을 통해 약속된 무한한 세계를 바람으로써 유한한 가치 세계의 상황을 초월해 영원한그분의 말씀가운데서 즐거움을 되찾고자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