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시 95:6)
여호와께 경배하라 Ⅰ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여호와께 경배하라 Ⅱ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마음의 완고함에 대한 경고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미국에서 자주 부르던 찬양. Come now is time to worship
시인은 우리를 경배의 자리로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시와 음악으로 여호와를 경배하자고 초대한다. 우리의 몸을 굽히며 무릎을 꿇고 마음을 드려 그분 앞에 “와서”그를 경배하자고 초대한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1절)’으로 알고 있는 백성에 대한 호출이다. 그분에게 돌리는 찬양을 부르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자는 부름이다. 아무리 늦어도 주후 4세기부터 많은 교회들은 이 시편을 공적예배에서 찬송에서 불러왔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잘 따르는가?
사실 우리는 따르기보다 헤맬 때가 많다. 당신 못지 않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행사에 참석하며, 많은 책을 읽는다. 아주 열심이다.
삶을 많고 많은 일로 경험하고 그 일들은 우리의 삶을 대변한다. 여기서 저기로,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이 일에서 저 일로 정신없이 옮겨다니다보면 문득 이 모든 것을 다 어떻게 해낼 수 있을지 막막한 기분이 든다.
조금만 돌아보면 온통 비상 상황에서 비상 상황으로 뛰어다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주 바브고 신경 써야 할 일이 여기저기에 널렸는데, 정작 도대체 왜 그렇게 바쁘게 사는 건지 잘 모른 채 그저 내달릴 때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살기보다는 살아지는 느낌으로 여기저기 헤매는 사람의 삶은 아주 피곤하다. 이 뼛속 깊은 피곤함을 우리를 무기력 하게 만든다. 이는 우리 대다수의 문제다.
우리는 많은 일을 하고 살고 있지만 그 일들 속에서 만족하기보다 오히려 그 어떤 일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할까 봐 초조해 한다. 마치 곡예사처럼 공중에 많은 공을 동시에 띄우고는 어떻게 하면 하나라도 떨어뜨리지 않을지에 골몰한다. 참 피곤한 일이다. 이내 녹초가 된다.
헤매던 삶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는 삶으로 옮겨 간 이들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다.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헤매는 사람과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 모두 전혀 인생의 진전이 없다.
누구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어떤 날에는 헤매고 어떤 날에는 주저앉아만 있다. 이렇게 끝없이 피곤한 우리 세상 속으로 오늘 시편의 시인은 우리에게 음성을 들려준다.
“오라, 우리가 하나님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1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쇼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6-7절)
1/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초대(1-7절)
이 시편에서는 회중을 예배로 초대할 뿐 아니라 예배할 것을 권유한다. 우리는 ‘하자’는 어구의 반복만이 아니라 찬양의 이유로서 “여호와는 .. 때문이로다”라는 말을 듣는다. 여호와가 누구신지 알기 전에는 그분을 예배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과연 그 분은 누구이신가? 이 찬송은 그분이 ‘크신 하나님’(3절)이요, ‘우리의 하나님’(7절)이라고 답한다.
첫째, 그분은 크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의 지고하신 분,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다(3절). 시인이 모든 신들을 객관적인 실체로 승격시킨다고 짐작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시 96:5)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땅에서도 지존자이시다(4-5절). 하나님의 통치를 넘어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모든 방위를 다 건드린다.
‘땅의 깊은 곳’, ‘산들의 높은 곳’ 그리고 넓게 펼쳐진 ‘바다’와 ‘육지’가 모두 그분의 것이고, “그의 손이 지으셨다.”(4-5절). 태초에 우주를 지으신 손이 지금도 우주를 붙들고 계시다.
두 번째, ‘우리의 하나님’(7절)이시다. 그분의 광대함은 우리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선하심에 관한 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 그분의 위험은 자비로, 그분의 영광은 은혜로 조화된다. 그분이 세상을 지으셨는가? 그분은 이스라엘도 지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6절)이시다. 만물의 조성자께서는 자신의 특별한 백성의 구속자이시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7절)이므로 그분은 우리의 목자이다.
(요 10:2-4)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우리는 목자의 역할을 알지만 양의 역할을 간과할때가 많다. 양은 무엇을 해야하나, 그의 음성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가? 그리고 따르는가?
시편 95편은 하나님의 속성 중 어느 하나에 시선을 집중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예배가 달라질 수 있음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1-2절의 초대에서는 여호와를 향해 기쁨에 찬 소리를 내면서 감사함으로 그분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자고 한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창조에 나타난 그분의 위대하심 때문에 환호성을 지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6절에서는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고 초대한다. 왜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7절). 이 크신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우리의 목자임을 자임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양이라 불러주셨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왁자지껄 떠들때가 아니라, 경의와 놀람을 표해야 할 때다. 공경과 겸손으로 그분앞에 엎드려 숨을 죽여야 할 때다. 7절의 말미에서 분위기는 다시 반전된다. 화자도 바뀐다. 지금까지는 회중이 서로 권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분위기가 너무나 다르다. 앞부분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그 구원의 감격을 찬양하며 환호한다면, 뒷부분은 그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저버리고 거역했던 완고한 광야의 기억이 경고와 저주처럼 펼쳐진다. 어떻게 한 편의 시로 되새겨야 할까? 그래서인지 오경웅은 7절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행인가? 그분의 은총을 깊이 입었으니라고 고백한다. 동시에 8절에서 ‘너무나도 선명해서 외면할 수 없는 주님의 교훈이 조상들에게 있었다’라고 진술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초대(8-11절)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입술을 열고,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열여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권면을 받은 자들이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7절)이라고 묘사된 점이 눈길을 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생생한 시청각 교재로 사용하신다. 애굽에서 나온 후 한두 달 지나 이스라엘 자녀들이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르비딤에 진을 쳤다. 거기에는 물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에게 시비를 걸었다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는 여호와께 기도했고, 명하신 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치자 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 사건후 모세는 이곳에 지명을 부여한다. 떠봄 혹은 유혹이라는 의미의 ‘맛사’와 다툼 혹은 격돌이라는 ‘므리바’가 그것이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기 17장 1-7절에 나온다.
40년 후 ‘가데스’에서도 비슷한 위기가 터졌다. 그들이 모세를 향해 원망하자 하나님은 다시금 기적으로 물을 주셨다. 이곳 지명은 나중에 ‘므리바 가데스’로 알려진다. 르비딤에 있는 므리바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민수기 20장 1-13절에 기록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내내 시험했다. 증거를 보여달라고 졸랐다. 그분이 하신 일들을 보았지만 그들은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해내셨다. 광야에서 먹여 살리셨고, 특별한 계시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하나님께 들고 일어난다.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왔다는 말씀은 조금도 심하지 않다.
한편 하나님은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10절)이라고 칭하셨다.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은 비뚤어진 마음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죄, 불신, 반역이 너무나 커, 하나님 마음에 혐오감이 들게 했다(11절). 성경은 사랑과 진노, 선하심과 엄위하심의 하나님을 계시한다. 죄인을 사위지 않는 사랑으로 대하시나 또한 죄는 극히 미워하신다.
‘미혹된 마음’이란 ‘방황하는 마음’인데, 길을 곧게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오가는 형태다. ‘내 길을 알지 못한다’라는 표현이 바로 이어지는데, 역시 가야 할 곧은 길로 가지 못한다는 듯이다. 그 결과, 11절에서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선언이 나온다. 9-11절은 광야 때에 이스라엘 1세대가 불순종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음을 언급한다.
히브리서는 이 구절들을 오늘을 사는 신자들을 위한 메시지로 내어 놓는다.
(히 3:7-13)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12]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 참고도서
존스토트, 『내가 사랑한 시편』, 김성웅옮김, 포이에마, 2012, 159-164쪽
『묵상과 설교』, 성서유니온, 2017년 9·10월호, 시편 95편
오경웅, 『시편사색』, 송대선 옮김, 꽃자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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