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고 불리는 그대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대들이 울부짖지 않는다면 어떤 생명도 없을 것이다. "
_존 번연(John Bun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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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벨론 포로들이 애곡(1-4절) -스스로 금지한 노래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2/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5-6절) -기억에 상주하는 노래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3/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갈망(7-9절) -심판으로 완성되는 노래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마음 문을 열며
시편 137편은 그저 바벨론 포로기에 불린 노래라고 아련한 향수를 일으키는 고향 노래로만 밀쳐둘 수 없는 노래이다. 도리어 오늘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잠시도 떠올리지 못하게 하려는 정신없는 물질문명 첨단 세상에서 더 깊이 되새겨야 할 노래이다.
차라리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선연히 기억하며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간절히 도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을 이곳에서 얽어매는 것에서 벗어나길 기도한다. 자신이 지금 여기 있는 이유가 분명하니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도 알고 있다. 묵묵히 이 말씀 들여다보면 혹 나는 그 조차 잊어버리고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잊은 오늘의 신앙인이 아닐까 두렵다.
성도들의 인생에 슬픔에 완전히 압도되어, 하나님을 찬양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성도는 그럼에도 주를 찬송해야 하지만 낙심과 패배로 얼룩진 인생의 계절이 있다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그러한 낮은 골짜기에서 찬양도 하나님의 자녀를 피해가 ㄹ때 그의 마음은 절망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실제로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충격적인 상실을 겪고 있는데 연유한 절망일 수도 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기독교 지도자가 죄에 빠진다. 어떤 교파가 하나님 말씀과 위배되는 결정을 내린다. 교회가 열정을 잃고 문을 닫는다. 거짓 종교가 상당 부분 잠식하여 그 지역의 복음 증거를 위축시킨다. 그 모든 패배의 결과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영혼을 휘몰아치며 깊은 슬픔을 안긴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비통해서 노래할 수 없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시편 137편을 쓸 때 느꼈던 바로 그 고통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사랑하던 성전은 파괴되고 이국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다. 또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었고, 그들이 느끼는 고통은 영혼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모욕하며,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 비난하는 바벨론 인들의 괴로운 조롱을 들었다. 머리를 들지 못하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을 것이다.
이 시편을 예전에 읽어 본 일이 있는가? 마지막 절을 읽고 나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기억하는가? 제 경우에는 ‘충격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끼친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순수한 아이를 잔인하게 죽이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그때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이 런 구절이 성경에 있을 수 있지? 하나님이 설마 그런 짓을 권하실까? “?“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다. 데릭 키드 너는 말한다. “이 시편의 각 구절마다 살아 꿈틀거리는 고통이 느껴진다. 절이 진행될수록 고통은 점점 더 커져 마지막에는 무시무시한 절정에 도달한다.” 시편 전반에 나타나는 복수심과 관련하여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시편 가운데 소위 저주의 노래라고 불리는 부분만큼 현대인들이 어렵게 느끼는 부분도 없다. 그러나 시편 전체에 걸쳐 이 주제가 드러나는 부분이 많다. 이 시편들로는 기도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모두 왜 이런 구절이 시편에 있는지, 궁극적으로 왜 이 시편이 성경의 일부로 남아있는지 설명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섣불리 대답하려고 하지는 말자. 우선은 우리가 마지막 구절뿐 아니라 이 시편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 본문과 씨름하며
1/ 바벨론 포로들이 애곡(1-4절)
[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이 구절을 읽으면 광활한 도시 중앙에 있는 커다란 오아시스에 흐른 ㄴ강줄기가 상상된다. 고상한 차림으로 주일 오후 공원에 소풍을 나온 모습일 것만 같다.. 하지만 다음 문구를 보면, 이런 상상도 멈춘다. 나무에 걸린 수금을 상상하면 그 정경이 아름다울 것 같지만, 이 시를 읽노라면 미적인 감상보다는 동정하는 마음이 더 커진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수금이 버드나무에 걸려 있는지 시편 기자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우리까지 감정에 북받치게 된다.
바벨론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제국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라는 뜻으로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뜻하며, 바벨론은 이 두 강 중 유프라테스 강 남동쪽에 자리 잡았다. ‘여러 강변’은 유프라테스의 강변을 가리킨다. 이 강은 2,850킬로미터의 서아시아에서 가장 큰 강이며, 에덴동산(창 2: 14)과 아르메니아 산악 지대에서 발원하여 여러 지역을 관통해, 남쪽에서 티그리스 강과 합류하여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시인과 무리의 몸은 바벨론에 있으나 마음은 시온에 있다. 이 땅 바벨론에서 그들은 이방인일 뿐이다. 시온을 생각하니 애통의 눈물이 흐른다.
바벨론은 유형지의 상징이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은 포로 된 삶을 살았다. 더 이상 자유롭지 못했던 이스라엘 꿈을 접은 채 생존의 기술을 익히는 타율의 인생이다. 그 어느 날 홀연히 우리는 바벨론에 던 지 우는 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그날 우리는 노래를 잃어버린다.
바벨론 강가에서 제일 먼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기억이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고 울기 시작한다. 우리는 또한 예루살렘의 자유를 기억하게 된다. 그 잃어버린 과거의 축복과 풍요를 기억하고 우리는 현재의 슬픔 속에 가라앉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무엇인가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억은 새로운 존재의 시작일 수 있지만 기억만으로 잃어버린 과거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진정한 회복의 출발은 회개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던가를 우리는 분명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노래 아닌 노래
이 유배지에서 회한의 눈물이 쏟아진다. 잃어버리고서야 맘껏 찬양할 수 있었던 날들이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얼마나 하나님께 망할 짓을 했는지 생각난다. 그리워 울고 후회스러워 운다. 지배자들이 조롱하듯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고 하자 괴로워 운다. 찬양은 대범한 신앙고백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는 곳에서 우리의 찬양은 조롱이 된다. 찬양을 부를 수 없을 때가 되기 전에 우리의 고백과 찬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어울리는 삶으로 화답하자.
2/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5-6절)
[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재주를 잊은 손’, ‘입천장에 붙은 혀’와 같은 강렬한 표현은 그들의 고난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시를 읽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바벨론을 향한 비난에 동참하게 된다. 그 강렬한 수치까지도 인정하게 된다.
오경웅은 이렇게 번역한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 포로 된 몸뚱이가 어떻게 눈물 머금고 고향노래 부르랴. 비록 남의 땅에 끌려 왔으나 마음은 애오라지 예루살렘에 있네, 혹여 원수에게 아첨하며 비파 타면 이 손이 끊어져라 입이여 붙어 버려라”
이방 땅 침략자 앞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박에 없었지만 그것이 시인에게 기쁨 일리 없다. 아무리 굴욕적 상황에서 찬양하더라도 예루살렘과 다윗에게 허락하신 회복의 약속,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보다 더 즐거워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잊고 침략자를 기쁘게 하려 한다면 수금을 타는 오른손이 말라도 좋고, 찬양하는 입술이 천장에 붙어도 좋겠다고 맹세한다.
3/ 원수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을 갈망(7-9절)
[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 네 어린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에돔은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을 때 그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자기 형제 나라의 불행을 기뻐했다. 하나님의 성이 그 기초까지 남김없이 무너지라고 저주했다. 시인은 에돔만이 아니라 바벨론의 심판도 확신했다. 하나님이 나라와 하나님의 성전을 유린한 바벨론의 죄악을 하나님께서 결코 잊지 않으실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있어야 찬양할 수 있다.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신앙을 지킬 수 있다.
7절의 에돔에 대한 기도와 8-9절의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을 구하는 기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을 기원하는 기도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대해서도 이미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을 약속하셨다(렘 25:14-17). 시간이 흘러 바벨론이 페르시아에게 망하고, 이스라엘이 유다로 돌아오게 됨으로써(주전 538년)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다(대하 36:20-23; 스 1장)
전쟁이나 테러로 자기 고향과 집을 잃은 사람이라면, 이처럼 점점 커지는 시편 기자의 증오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 때문에 자신의 땅을 몰수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증오를 생각해 보라. 외국 군대의 무력으로 초토화된 나라를 지켜봐야 하는 이라크 사람들의 증오를 생각해 보라.
사람은 자신이 행한 대로 돌려받는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정의로움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모습이다. 예수님을 마구 때리며 즐거워하는 로마 병사의 모습을 보면, 누군가가 이 병사들도 채찍으로 마구 얻어맞는 꼴로 보고 싶어 한다 해도 이해가 될만한다.
이 시편의 마지막 절은 다르게 펼쳐진다. 우리는 그 구절대로 기도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 가슴속에 울린다. “.“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 10:14), 당한 대로 보복하는 일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씀도 기억나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막 5:44). 다른 말로 하면,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오른 시편 기자가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구절로 시편을 끝낸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우리는 시편은 현실을 충분히 반영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기도 하지만, 부당하게 고발당한 자의 고통스러운 좌절과 분노도 보여준다. 회개한 자의 감사의 마음도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의 느끼는 분노도 있다. 평온하게 목자를 신뢰하고 사랑하는 양 떼의 모습도 보이지만, 모든 잘못을 바로잡기 바라는 자의 날카로운 복수도 있다.
시편 기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저주의 말은 고통스럽지만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토로일 뿐이다. 읽다 보면 소름 끼치는 표현 때문에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같은 상황이 닥치면 우리도 그렇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시편 기자들이 맞닥뜨린 비참한 상황 가운데서 영혼으로 울부짖지 않을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참 인간이시고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셨던가. 인간 본성에 대한 철저한 현실주의적 성찰이야말로 우리가 시편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깨닫기 위해 꼭 알아야 할 핵심이다.
☞ 정곡을 콱 찌르며
동물은 대사활동을 낮춘 동면 상태에서 겨울을 나고, 식물은 최대한 수분을 탈수시켜 휴면 상태로 겨울을 난다. 형벌 같은 겨울이더라도 결국 닿고 말 희망의 봄에 이르려면 몸을 낮추고 숨죽여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 시온의 찬양을 다시 꺼내 부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기도 구원의 우물에서
주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안한 때는 없었습니다. 행복에 겨워 권태롭게 우리 인생을 살아낸 적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쫓기듯 살았습니다. 가슴 아픈 일들, 그리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던 것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의 샘물을 길어 오르는 능력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소서. 세상이 아무리 척박하다 해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감으로써 세상을 밝히는 한 점 등불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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