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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말씀 묵상

시편 8 편

 


 

 

  기도란 방향을 잡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때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발견한다.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혼란과 불안에 빠진다. 게다가 무모하게 행동하기 쉽기 때문에,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만약 적군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만약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좋은 인간 관계를 잃어버릴 수도 있다. 만약 낭떠러지를 따라가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모른다면, 발을 헛디딜지도 모른다.

 

 


 

말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는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 질문앞에 고독하게 서게되는 순간이 있다. 이 대답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인간을 성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 참된 인간은 성적으로 해방된 존재로 본다. 칼 막스는 인간을 철저하게 경제적인 존재로 본다. 경제적 분배가 공평한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었다. 나름대로 인간을 해석하고 나름의 대답을 주려고 한다. 과연 인간은 무엇인가? 또 나는 누구인가?

종종 비행기 조종사들은 그들이 조종하고 있는 비행기가 거꾸로 나는지 바로 나는지를 모를 때가 있다고 한다. 이런때 계기판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보게하는 계기판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이다.

본문 4절에서 사람이 무엇이 관대로 시작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다윗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노래. 깃딧은 고대 히브리인들이 사용하던 일종의 악기 명칭일 것으로 추측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단어가 그리스에 가서 카타라라는 단어가 되고, 스페인을 거쳐 기카라’, 다시 영어로 기타라는 단어를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기타의 선율에 맞추어 하늘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창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다가 갑자기 다윗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 하늘도 담을 수 없고 땅을 담을 수 없는 영광스러운 주님. 그 하나님이 무엇이관대 나를 사랑하셨느냐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에 덮었나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숨바꼭질처럼 숨기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 보이시며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소개하신다.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34:5-6)분으로 자신을 소개하신다.

주님이 그 영광을 어디에 두셨나? 하늘에? 아니다. 하늘 위에 두셨다. 하늘도 그 영광을 다 감당할 수 없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드리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들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어찌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에 거하시겠나이까’(왕상 8:27).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삼아 그 분의 영광을 다 기록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온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갑자기 2절에서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이 등장한다. 원수와 보복자들과 대조를 이루는 이들이다. ?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는가?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 아름다운 이유가 설명되기 때문이다. 주께서 약한자들을 통해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시며 강한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때문이다.

주의 대적은 시편1편의 악인들이며, 2편의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며, 3편의 일어나 치는 대적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영광을 대적하는 자들이고, 어린아이와 젖먹이들은 유약하고 겸손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젓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고 이들을 통해 보수자의 소리를 잠잠케 하신다.

강을 따라 버려진 한 아이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삼아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킨 분이다. 장자권을 중시여기는 이스라엘사회에서 보잘것 없는 막내아들 들에서 양을 치고 허드렌 일을 하는 다우시을 기름부어 이스라엘과 유대의 왕국 통치자로 삼으시고, 감옥속에 갇혀지고 잊혀지고 버려진 요셉을 들을 온 애굽과 근동을 먹여살리는 통치자로 삼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113:5-9)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한다.

(고전 1:26-29)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나약함이 있는가? 그것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을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시인은 이제 무엇을 보는가?

3절에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그 하나님의 위대한 창조앞에서 인생을 본다.

밤중에 밖에 나가 별 빛 아래 홀로 걸어보라. 별들이 총총히 박힌 하늘을 쳐다보다 별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인 우리의 태양보다 더 큰 천체들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25천만 25천만개가 우주의 거대한 공간을 가로 질려 뿌려져있다.

세계에 100억개의 집이있고, 그 집 마다 10개의 방이 있고,그 방 한 가운데 하나의 백열등이 있고, 그 백열등에 9개의 파리가 붙어 있다고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백열등에 붙어 있는 3번째 파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 우주 속에서 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지구가 속한 은혜계만 해도 1000억개의 별들을 풀어 놓으셨고, 우주에 그런 은하계를 1000억개나 만들어 두신 하나님이다. 또한, 각각 만개의 연결 고리를 가진 750~1000억개의 신경세포를 두어 줌 빚어서 살 속에 넣으시고 두개골로 잘 감싼 뒤 그것을 뇌라고 부르신 하나님이시다.

 

몸이 굽혀 뒷마당이나 길가에서 흙을 한 줌 집어보라. 그 흙을 현미경에 올려놓고 그 안에 수십 억의 미생물로 가득한 것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감짝 놀란다. 그 많은 미생물들이 나름의 독특한 세포조직이 아주 복잡하게 얽혀 그것들의 기능을 아직까지 제대로 현대과학이 다 밝혀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아메바도 작지만’ ‘단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사람의 복잡한 세포조직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며, 심지어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실 정도로 세밀히 관여하사 생각하시고 권고하고 계신 것이다.

 

그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5절을 보니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와 관을 씌우셨나이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인간에게 위탁하셨다. 인간이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낸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집짐승인 소나 양이나 야생동물인 들짐승, 공중을 나는 새와 바다의 어족에 바다길로 다니는 이름모르는 것들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맡기셨다. 1:26의 말씀처럼 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정복하게하셨다.

우리는 어떤 자아상을 가지고 있는가?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는 것 낮은 자존감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만원짜리가 구겨진다고 만원이 아닌 것은 아니다.’ 혹은 자기숭배에 빠져서 교만함의 극치를 달리는 것도 잘못이다. 하나님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우리는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한다. 자만과 자학은 둘다 비성경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서 있는 지극히 부족한 자이지만 그 분의 존귀함으로 관 씌워진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오며

 

 

어미 독수리가 새끼독수리를 낳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생겨 어미 독수리가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농부가 그 새끼 독수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농장에 데려다 닭장에서 병아리와 함께 키웠다. 이 새끼 독수리는 자신도 병아리라고 생각했다. 단지 다른 병아리오 모양이 조금 다를뿐이라고... 그래서 병아리를 모방한다. 병아리처럼 걷고 놀고 먹고 노래한다.

그런데, 어느날 바람이 몹시 불던날, 닭장 박으로 아주 아름답고 멋진 새 한 마리가 창공을 치고 비상하며 나는 모습에 꽂혔다. ‘저게 무슨 새지?’

그러자, 병아들이 말한다.

너는 저 새도 몰라. 새들의 왕자 독수리야. 독수리만이 저렇게 날 수 있지. 그러나 우리는 닭새끼야, 우리는 병아리야, 날수 없어이 말을 들은 새끼 독수리는  닭장과 마당의 세상에 안주할지, 독수리의 본능을 일깨우는  독수리의 심장으로 그곳을 뛰쳐 나와야할지 결정해야 했다.


주약교회 김광영 목사


시편 8

 Wed 26th Dec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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